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데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Vol. 2>(2003) 오마주를 만나고는(8화) 어찌나 들썩였던지. 혼자 웃음이 터지고 미소가 그렁거리고 그랬다. 그런 작품을 보면, 사랑스러워서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인물과 인물이 서로 주고받는 말과 말 사이의 흐름과 연결이 좋은 이야기. 인물의 직업이 그 직업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를 갖고 있고 그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을 사는 방식이 되는 이야기. 아직 펼쳐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기다리면서 앞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고 돌이키게 되는 이야기. 말 한마디에 노심초사 하고 눈빛과 걸음과 표정 하나에 마음이 일렁이는 이야기. 작품을 보고 있지 않은 동안에도 인물들이 여전히 거기 살아 숨 쉬고 있을 거라 믿어지는 이야기. '미주'(신세경)의 직업이 외화번역가이고 작품에 영화 관련 이스터에그들이 많이 나와서 보기 시작했지만 [런 온](JTBC, 2020)을 챙겨보는 일이 올해의 시작을 함께한 잘한 일이라고 손에 꼽을 만큼 소중해졌다. 김은숙 작가의 몇 작품에 보조작가로 참여했던 박시현 작가의 데뷔작이고 누가 출연해서 무슨 역할을 맡고... 그런 거 말고, 내게는 한 줄의 설명이면 족할 것 같다. 어두운 극장 상영관에 앉아 영화를 만나는 일의 떨림을 생각하게 하는 드라마라서. 아래는 7화와 8화를 보면서 메모했던 말들 중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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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짜리 외국어 번역보다 그 사람이 한 우리말 한마디가 훨씬 더 어렵고 해석이 안 될 때가 많아요. 어려우니까 풀고 싶고 모르니까 알고 싶고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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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공짜 영화라고 기분 더러우면 그냥 티켓 날려 버리겠지만 나한텐 극장에서 먼저 볼 수 있는 기회고 날 초대한 누군가의 마음이고 자리 지키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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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이 골든 벨을 울리는 주인공보다는 우연의 행운 혹은 술 한 잔의 행운을 찾는 그... 술집 안에 있는 손님 1에 더 집중을 했던 거지. 이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무슨 술을 시켰을까. 무슨 이유로 저 구석 자리에 우중충하게 앉아 있을까 하는 뭐 그런 식의 접근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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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참, 그게 휘파람 소리라는 게 볼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너무 신기해요. 내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 때 보면 또 다르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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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리는 거예요?"
"그려 봐야 알겠죠. 끝나 봐야 아는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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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연인진 몰라도 네 손 잡아줄 정도의 인연이면 귀하게 여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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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런 온]을 보시다 보면 앞서 언급한 <캐롤>(2015) 외에도 <달세계 여행>(1902), <카사블랑카>(1942), <졸업>(1967),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대부>(1972), <E.T>(1982), <제리 맥과이어>(1996) 등 영화 이스터에그를 한가득 빼곡하게 찾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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