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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괜찮아?"라는 물음에 "다시는 그런 질문 하지 마"라고 간신히 답할 수밖에 없었던 이가 있다. 행복했던 순간 예고 없이 찾아온 사고. 바로 그 날 이후 그의 삶은 달라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고 더 나아질 리도 없다고 체념했을 때. 살아 있다는 것이 짐이라고 여기게 되었던 때. 계절이 바뀌듯 꽃이 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것은 그런 이야기다.
넷플릭스 영화 <펭귄 블룸>(2020)은 작중 '샘 블룸'(나오미 왓츠)의 남편이자 사진작가인 '캐머런 블룸'이 (작가 브래들리 트레버 그리브와 공저한) 집필한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원작자인 샘과 캐머런 부부가 제작자(executive producers)로도 참여했으며 주연인 나오미 왓츠 역시 메인 제작자(produced by)로 <펭귄 블룸>을 완성했다. 샘과 캐머런 부부의 실제 집이 있는 호주 시드니 북부 해안에서 촬영했으며, 영화에 등장하는 까치 '펭귄' 역은 실제 열 마리의 까치들이 '연기'했다.
<펭귄 블룸>을 보기 전이라면 불의의 사고를 당한 주인공이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던 중 어떤 일로 인해 서서히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나가는 흔한 고난 극복기 정도로 짐작하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는 맞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굳이 고려하지 않더라도 <펭귄 블룸>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나름대로 뻔하지 않은 방식으로 마음에 다가온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 '샘'은 왜 "How are you?"라는 물음에 그렇게 답했을까. 간호사이자,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온 '샘'은 사고 이후 침대에서 일어나 휠체어에 앉는 것조차 스스로의 힘으로 하기 어려울 만큼 생활의 많은 것이 제약을 받게 되었다.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고 실내에서만 지내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는 '샘'은 아이들을 등교시키거나 하는 일상적인 것도 남편인 '캐머런'에게 사실상 일임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앞에서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려 애써야 하고 '캐머런'에게도 자기 속내를 제대로 털어놓지 못하던 '샘'은 안으로 안으로 아파갔다. '샘'은 괜찮지 않았고 괜찮을 수도 없었다.
둥지에서 떨어져 몸이 불편하게 된 어린 까치를 아들 '노아'(그리핀 머레이-존스턴)가 발견한 일도 처음에게는 '샘'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어쨌든 '노아'는 집에 데려온 까치의 이름을 '펭귄'이라고 짓는데, 펭귄이 날지 못하는 새라는 점, 다시 말해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활공하지는 못한다는 점은 쉽게 '샘'이 하반신을 가눌 수 없다는 것과 연결된다. 그러나 <펭귄 블룸>은 단순히 '샘'과 '펭귄'의 관계나 서로 간의 대응에만 주목하지 않고 '블룸 가족' 모두의 이야기를 95분이라는 짧은 상영시간 안에 담아내고자 노력한다. 실질적으로 영화를 열고 닫는 것이 '샘'이 아니라 '노아'의 내레이션인 점, '블룸 가족'과 '펭귄' 사이의 유대감이 형성되는 과정과 가족들 각자의 감정들이 내면적이거나 외면적인 발화로 오고 가는 과정이 양립되는 점이 <펭귄 블룸>을 내내 분주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좋은 배우들의 연기와 때때로 멈춰 인물을 바라볼 줄 아는 영화의 시선 덕에, 이 이야기는 제법 만족스러운,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줄 아는 드라마로 다가온다.
중반부 '펭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뒤 집 안에서의 가족들 간의 대화가 펼쳐지는 신이 있다. '노아'는 엄마에게 찾아온 사고가 자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안고 있었는데 다른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샘'과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던 '샘'이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강하지 못해서 그걸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자신을 건사하는 것도 벅차 남편은 물론 아들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그의 고백은 '노아'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제대로 말해주지 못했던 것에 기인한다. '샘'은 덧붙인다. "엄마도 이걸 이겨낼 만큼 강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엄마는 강해."
그러니까 이것은 극도로 약해지는 상황에 침잠해 있던 이가 다시 강해지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역경을 딛고 재기하는 인간승리 이야기 같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삶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그 발판을 보여주는 쪽으로. 어떤 장면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다. "좋은 일은 갑자기 생기기도 하더라."였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인과관계와 맥락을 헤아릴 겨를도 그럴 단서도 없이 많이 일어나고는 한다. <펭귄 블룸>은 어떻게든 삶의 기쁨을 되찾고자 노력하는 인물이 어떻게든 삶의 궤도를 벗어나 낙담하고자 애쓰는 것처럼 보였던 인물을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방식으로 보듬는다. 김창옥 교수의 책 제목처럼, "당신은 아무 일 없던 사람보다 강하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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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netflix.com/title/8135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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