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머문 이야기

미야모토 테루 소설 '환상의 빛'

cosmos-j 2018. 12. 10.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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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아난티 코브에 있는 '이터널 저니' 서점에서 지난달 산 책을 이제야 펼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환상의 빛>(1995)의 원작인 '환상의 빛'을 포함한 네 편의 중단편이 실린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집. "예컨대 인간은 살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저 죽고 싶어서 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생의 무도한 불가해함은 가혹한 허방인 동시에 매일 몸을 일으켜 다시 살게 만드는 요염한 신기루 - 환상의 빛이라는 것."(김혜리 기자)이라는, 책 뒤표지 글의 일부를 가져다놓는다. 2년 전엔가 기획전으로 만나게 된,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의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 그의 데뷔작이었다는, 잘 이루어지기 힘든 경험을 안겨준 영화를 어렴풋이 떠올리면서. 단어를 넘기며 문장 사이로 시선을 두다 보니, 까닭 없이 철로 위를 똑바로 걸으며 세상을 등진 '당신'을 향해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유미코'의 고백은 고스란히 쇠락한 바닷마을의 풍경이 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롤랑 바르트의 문장들을 되새겼고, 어느날 자신을 떠나간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삶의 한순간을 잊을 수 없게 만들고야 마는 초월적인 시간들을 생각했다. '유미코'는 바로 그 빛을 본 순간에야 비로소, '당신'과의 헤어짐으로부터 한 번 더 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짧은 중편을 어렵사리 겨우 읽고, 아직 세 편의 단편이 더 남았다. 무엇을 잃은 사람은 앞모습마저 처연하다. 이렇게나. 다만 이것은 무기력한 애도라기 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않고 그저 믿어주"(어반 자카파, 'River'에서)려는 자의 모습이다. 허물처럼 살아지는 대로 살아내다가 이제야 조금은 생의 외피를 다시 갖춰낸 듯 보이는 모습. (2018.12.10)

"비 그친 선로 위를 구부정한 등으로 걸어가는 당신의 뒷모습이 뿌리쳐도, 뿌리쳐도 마음 한구석에서 떠오릅니다. 유이치를 데리고 이곳 세키구치 다미오의 집으로 시집 와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 저는 당신이 죽은 그날부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해서 마음속의 혼잣말을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12쪽)

"그리고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은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저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당신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 후 허물처럼 살아왔습니다. 당신은 왜 자살을 했을까, 그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저는 멍해진 머리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가 생각하는 데 지쳐서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되어 집주인 부부가 꺼낸 재혼 혼담에 어느새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47쪽)

"그때 아주 시커멓던 하늘도 바다도 파도의 물보라도 파도가 넘실거리는 소리도 얼음 같은 눈 조각도 싸악 사라지고 저는 이슥한 밤에 흠뻑 젖은 선로 위의 당신과 둘이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 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피를 나눈 자의 애원하는 소리에도 절대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 (59쪽)

"아아, 역시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네요. 이야기를 시작하면 가끔 몸 어딘가에서 찡하니 뜨거운 아픔이 일어 기분이 좋습니다."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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