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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그렇지 않은 모든 시간들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해주는 어떤 가을의 풍경 '한층 강하고 너그럽고, 아름답게 빛나고/ 세계는 넓어지기도/ 깊어지기도 합니다' -황인숙, 「에세이의 탄생」, 『내 삶의 예쁜 종아리』에서 (문학과지성사, 2022) ⠀ 세상의 많은 일들을 지극히 제 일처럼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 생을 지탱할 누각을 세우고 싶어 늘 고민하고 돌아보는 사람. 연민하지 않고 나날이 기록하는 사람. 무엇이 서로를 슬프게 하고 기쁘게 하는지 다정하게 감시하는 사람. 다양한 얼굴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사람. 순간이 유일한 순간일 수 있도록 마음과 감각을 다하는 사람. 다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을 그저 바라보는 일로도 가능하게 하는 사람. 우리는 오늘도 실타래를 풀고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계절이 흘러가는 느낌을 휘발되는 감각이 아니라 보존되는 기억으로 삼고, 지나간 시간들조차 오늘.. 더보기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뒤엉킨 꿈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뒤엉킨 꿈을 꾸느라 뒤척인 새벽이었다. 본래 꿈의 세부를 잘 기억하는 편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나왔다, 대략 어떠한 상황이었다, 정도의 느낌만 남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을 유달리 감각하는 건 그 꿈이 처음이 아니라서다. 꿈속의 나는 과거 현실의 자신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의 선택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꿈의 내용을 돌이킨다면 끊임없이 불가항력적인 것에 이끌려 어떤 말과 행동들을 계속하는데 그 발화와 움직임의 결과와 영향을 알면서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계속해서 시달리는 것이었다. 아니, 꿈속이었으니 그걸 '사실'이라 부르면 안 되는 건가. 어쨌든 반복된다는 건 흩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다는 뜻이겠다. 과거의 실패, 혹은 넘어짐들. 꿈에서 그것들을 반복적으로 만나는 .. 더보기
더 이상 당신에 대해 쓰지 않겠다 '더 좋은 사람 만나'라는 말에는 '자신보다'라는 단서를 붙인다 한들 스스로가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단서가 섞여 있겠다 생각하는 쪽이다.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말은 곧 내가 당신에게 정확히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얘기. 그래서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고맙다고 했고, 잘 가라고 했고, 손을 흔들었다. 커피 얼룩이 묻은 채 거의 빈 머그, "잠시 후 도착 버스는..." 안내가 쉴 틈 없이 들리던 버스 정류장, 버스가 완전히 정차하기 전에 그 버스에 다가서던 사람들, 그리고 당신까지. 어떤 기억은 생생한 풍경으로 남아서 소환되곤 한다. 추위를 많이 타니까, 아프지 말라고 했고, 당신의 말은 "치,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하다니. 나쁘다." 같은 것이었다. 웃어보였던가. 그.. 더보기
벌써 11월 가을은 이렇게 짧구나. 어느덧 11월이 되었다. 혹은, 지나고 보니 11월이 되어버린 걸 발견했다. 계절은 모두에게 공평할 것이다. 날씨도 마찬가지겠다. 좋은 날씨, 나쁜 날씨가 나뉘는 게 아니라 저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좋을 날씨들이겠다. 며칠 내내 심규선(Lucia)의 노래만 듣고 있다. 전부터 폰 재생목록에 몇 곡이 있었고 아주 새롭게 접한 아티스트는 아니지만 특히 지난 얼마의 시간은 오로지 이 사람 노래만 들었다, 고 해야겠다. '부디', '이제 슬픔은 우리를 어쩌지 못하리', '소년에게', '외로워 본' 등 유난히 맴돌았던 몇 곡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다가오는 것들에 여전히 의연하지 못한 무딘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난주에는 듣고 싶었던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강연 행사에 다.. 더보기
제주도라니, 동진아 - 2박 3일의 제주도 방문을 나서기 전, 하늘과 바다가 한데 보이는 창밖을 잠시 더 바라봤다. 제주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기사님은 내게 혼자 다니면서 심심하진 않았냐고 물으셨다. 앞서 쓴 다른 글에서는 '다음의 제주에 있게 된다면, 누군가와 함께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라고 썼지만, 이 짧은 두 번의 밤이 좋았던 건 전적으로 혼자였기 때문이다. 렌터카 반납 시간과 김포행 비행기 체크인 시간 외에는, 그 무엇에도 쫓기지 않았다. 이미 10만 킬로미터를 넘게 달린 렌터카에 나는 200 킬로미터 남짓을 보탰다. 차와 내비게이션에 마음이라는 게 있다면 자꾸만 멈추고, 또 가라는 길도 안 따르는 차주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차를 타면서 생각했고, 어디로 갈지는 가는 길에 정했다. 추천받았던 장소 .. 더보기
다음 생이란 게 있다면, 그때는 딱히 전화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닌 아빠. 어쩌다 전화가 오면 영화 대사처럼 정해진 마디가 있다. 별 일 없쟤? 빈도는 적지만 하나 더 있다. 형아랑은 전화해봤나? 아 카톡했어요. 그랬더니 영주 한 번 왔다 가란다, 형은 그때 시간 된다고. 네 저도 괜찮을 거 같아요. 나는 가족에 있어서는, 별 일 없는 편이 대체로 좋다고 믿는 편인데, 그건 가족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반찬은 있는지, 쌀은 있는지, 퇴근은 일찍 했는지, 엄마와의 통화도 대체로 그런 이야기들이다. 이번 달에도 한 번 내려왔다 가라시는 걸, 토요일마다 일이 있어서 어렵다고 했었다. 명절 아니면 굳이 집에 자주 왕래하지는 않는데, 그래도 한 번쯤은 별 일을 만들어보게 된다. 서울 아들, 부산 아들이 저마다 비싸게 구니 부모에게는 그 바쁨이 쓸쓸.. 더보기
2018년 6월의 일기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요청되는 사막이며, 그 사랑은 긴 시간을 거쳐 공들여 만들어져야 한다는 깨달음이, 그가 긴 편력 끝에 순진함을 지불하고 얻은 소득이었다." 이 말은, 선생님의 신간의 138쪽에서 담은 이 글은, 그의 번역으로 나온 [어린 왕자](열린책들, 2015)의 역자 해설에도 실려 있다. 유월은 그런 달이었다. 이미 읽은 문장에서 느낀 안전한 감정에 기댔고, 낯선 도전보다는 선생이라 느낄 만큼 신뢰하는 이의 텍스트에 기댔으며, 극장에서 만나는 신작보다 모르는 영화보다 안다고 여기는 영화에 빠져 들기를 희망했다. 읽은 시집을 다시 들고 다녔으며, 필사한 적이 있는 문장을 반복해서 꺼내곤 했다. 이는 좋아하는 것에 대한 탐독보다는, 더 이상은 불안하고 싶지 않았기 때..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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