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반응형

소설

김연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2020, 문학동네) 발췌 "그 도시는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청춘과 꿈을 묻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 청춘과 꿈의 이야기가 있기에 어떤 폐허도 가뭇없이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15쪽)"혼잣말처럼 기행이 말했다. 그건 어쩌면 불행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불행에 끌렸다. 벌써 오래전부터, 어쩌면 어린 시절의 놀라웠던 산천과 여우들과 붕어곰과 가즈랑집 할머니가 겨우 몇 편의 시로 남게 되면서, 혹은 통영까지 내려가서는 한 여인의 마음 하나 얻지 못하고 또 몇 편의 시만 건져온 뒤로는 줄곧. 기행을 매혹시킨 불행이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 더보기
테일러 젠킨스 레이드 소설 ‘에블린 휴고의 일곱 남편’(2023) (…) 가십 위주로 유통되기 쉬운 유명인의 이야기에 있어 우리가 진정 생각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도 마땅히 삶이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을 전부라 생각하고 흔히 그들이 자신과 똑같이 살며 사랑하고 느끼는 개인이라는 점을 잊는다. 유명하다는 이유로 마치 원치 않는 관심을 마땅히 감내해야만 하는 것처럼 당연시하기도 한다. 깊은 사생활까지 '알 권리'의 잣대를 들이대는가 하면 자신의 관심과 애정이 마치 유명인에게 무슨 말이든 해도 되는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처럼 착각해버리기도 한다. ⠀ 한편으로 에블린 휴고는 자신의 환경을 바꾸고 출세하기 위해 누구보다 상술한 대중들의 관심과 미디어 산업의 어떤 토대를 잘 이용한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결혼은 일종의 비즈니스처럼 계산된 면이 있었고 에블.. 더보기
SF 작가 어니스트 클라인의 소설 '레디 플레이어 투(Ready Player Two, 2024)' 리뷰 (...) 3. 과 1편으로 큰 성공을 거둔 원작자 어니스트 클라인이 직접 집필한 속편은 그 존재만으로 세계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기 충분한 작품이었다. 태생적으로 속편은 전편과의 비교를 당하는 숙명을 타고난다. 그런 점에서 1편에서 어니스트 클라인이 각종 대중문화 레퍼런스를 방대하게 풀어나가는 방식은 신선하고도 기발했던 반면, 에서 그 이상의 레퍼런스를 기대한 독자에게는 일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면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그 영향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톨킨이 자주 등장하고 그 서술 방식 또한 1편의 것을 답습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점은 이제 웨이드 와츠는 트레일러 빈민촌에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청년이 아니라 오아시스 그리고 오아시스를 운영.. 더보기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존 윌리엄스 소설 『스토너』(1965)를 읽고 (...)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107쪽) “그는 자신의 소망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그를 슬프게 했다.” (133쪽) 인생에서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 운명적 사랑과 직업적 성공이 자신의 것이 되리라는 낙관. 이들은 종종 그것을 품는 이의 마음을 배반한다. 악한 이들이 승승장구하고, 수고가 인정받지 못하며,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윌리엄 스토너의 삶을 실패한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문학 작품에서 만나리라고 어쩌면 가장 기대하기 어려울 종류의, 누군가는 볼품없다 할 이 이야.. 더보기
윤성희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문학동네, 2021) https://brunch.co.kr/@cosmos-j/1382 홀로 ‘얼음’이던 때, “이제 땡이에요”라며 다가오는 윤성희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문학동네, 2021) | 윤성희 소설에는 수많은 죽음들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목을 매 죽거나 친구가 심장마비로 죽거나 남편이 죽거나 아버지의 친구가 죽는다. 죽 brunch.co.kr 윤성희 소설에는 수많은 죽음들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목을 매 죽거나 친구가 심장마비로 죽거나 남편이 죽거나 아버지의 친구가 죽는다. 죽지 않으면 다친다. 킥보드를 타다 넘어지거나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다 차에 치이거나 운전 중 뒷차가 받고 그 충격으로 앞차를 받는다. 어떤 만남은 장례식장에서 일어나거나 장례식장 근처에서 일어난다. 그렇지만 『날마다 만우절』(문학동네, 2021.. 더보기
연극 '일의 기쁨과 슬픔'(2021) "상자를 열었다. 분홍색 하트가 그려진 백설기 한조각과 저마다 색이 다른 경단 네개, 쑥색 꿀떡 두개가 들어 있었다. 허기가 느껴졌고, 이내 침이 고였다. 랩 포장을 벗겨내고 샛노란 고물이 포슬포슬하게 묻혀진 경단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방금 쪄낸 듯, 아직 따뜻했다. 오늘 새벽에 찾았나보네. 나는 달고 쫄깃한 경단을 우물거리면서 생각했다. 빛나 언니는 잘 살 수 있을까. 부디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장류진, 「잘 살겠습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창비, 2019, 33쪽) ⠀ 연극 을 공연 마지막 날에야 관람했다. 소설에서 읽었던 인물들 - 민희, 구재, 빛나, 안나, 거북이알 등 - 을 무대에서 만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는데, 소설집 속 단편 중 여섯 편의 인물들이 마치 느슨한 세.. 더보기
소설과 영화 '걸어도 걸어도' 대략적인 줄거리) 작품의 주인공 ‘료타’는 이제 막 결혼을 하기로 약속한 ‘유카리’와 함께 부모님을 뵙고 인사드리러 고향에 가는 길입니다. ‘유카리’에게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아쓰시’가 있고요. 고향 집에는 주인공 ‘료타’의 누나 ‘지나미’ 부부가 먼저 와 있습니다. 여기는 아이가 둘이 있고요. ‘료타’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70대 노부부가 사는 이 집은 ‘요코야마 의원’이라는 간판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노쇠해서 진료를 그만두었지만 ‘료타’의 아버지가 의사였거든요. 가족들이 여기 모인 건 이날이 ‘료타’의 형 ‘준페이’의 기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될 예정이었던 ‘준페이’는 15년 전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한 소년을 구하다가 죽었습니다. 작품의 배경은 아직 .. 더보기
박솔뫼 소설 '미래 산책 연습' 메모 "수미는 웃으며 정승의 그런 이야기를 듣다 문득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보일 때, 혹은 차 좀 우리고 올게라고 말하며 뜨거운 물을 컵 안에 따를 때, 그러다 뜨거운 김이 얼굴로 들이닥칠 때 문득 삶이 저곳에서도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그 선명한 당연함을 그 순간 이해하게 되고는 하였다." "우리 모두는 각각 다른 사람으로 각기 다른 순간과 국면을 가지고 각자에게만 생생한 순간들을 살아가는데 우연히 언니와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어서 좋았다는 생각, 그리고 그 자리에 친구와 다시 오게 되어서 좋다고 수미는 생각했다. 우리는 웃고 있고 우리는 웃고 있어. 정승은 웃으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고 수미는 웃으며 손을 뻗어 정승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빗나갈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정.. 더보기
'걸어도 걸어도' - 늘 이렇다니까. 꼭 한 발씩 늦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일흔을 넘겼지만, 아직 그때는 건강하실 때였다. 언젠가 그분들이 먼저 돌아가시리라는 것은 물론 알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젠가’였다. 구체적으로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는 상황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그날, 무언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른 척했다. 나중에 분명히 깨달았을 때는, 내 인생의 페이지가 상당히 넘어간 후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신 뒤였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걸어도 걸어도』 ⠀ 한 시절이 정녕 지나간 것이 맞는지 거기 내내 서서 소실점을 바라보다가도 할 일을 하고 갈 곳을 다시 걸어가는 날들. “늘.. 더보기
다시,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아버지도 어머니도 일흔을 넘겼지만, 아직 그때는 건강하실 때였다. 언젠가 그분들이 먼저 돌아가시리라는 것은 물론 알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젠가’였다. 구체적으로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는 상황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그날, 무언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른 척했다. 나중에 분명히 깨달았을 때는, 내 인생의 페이지가 상당히 넘어간 후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신 뒤였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걸어도 걸어도』 한 시절이 정녕 지나간 것이 맞는지 거기 내내 서서 소실점을 바라보다가도 할 일을 하고 갈 곳을 다시 걸어가는 날들. “늘 이.. 더보기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