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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머문 이야기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며 시인은 시를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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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음이 점차 짙어지는 순간을 우리는 하루에 한 번씩 맞이한다. 저녁이 밤에게 자신을 내어줄 때이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이들은 시인이 된다. 박준도 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 이 세계와 만나는 자리에서 결국 우리들은 우리를 글썽이며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 그래서 저녁이면 만나서 밥과 술을 먹고 서로 택시를 태워주며 헤어지다가 문득, 당신이 생각날 때. 그런 마음들이 애잔해지는 이런 시들을 쓰고 싶다. 바로 다음과 같은 시. (...) 그러니 세계야, 나는 널 버리지 않을 거야. 나의 간절한 것들의 깊은 눈을 모아다가 그냥 시를 쓸 거야. 그러니 세계야, 계속 날 불편하게 해줘. 내가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당신을 응시하며, 그리고 어제 해결하지 못한 눈물을 젖은 모자에 집어넣으며 그냥 쏘다니게 해줘. 어느 날, 운 좋게 싱싱한 바지락 국물 속에 든 수제비를 삼키며 멀고도 먼 농담을 사랑하면서 말이야. 그래, 나는 이미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낸" 이 세계의 어떤 무엇이라니까."

(허수경, 박준 시집『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에 쓴 발문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며 시인은 시를 쓰네>에서 발췌)

최근 출간된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을 읽으며. (+심규선 새 앨범 <환상소곡집 op 2 [ARIA]>에 실린 단편 '바다 위의 두 사람'을 같이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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