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쓰면 독일어를 쓸 때보다 더 많은 사람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방은 세계에서 특정한 나라의 특정한 계층에 속한다. 또 영어로 번역한 문학도 문학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영어를 안다고 해도 세계의 우수한 문학을 다 읽지는 못한다. 이 사람만 존재하면 다른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완벽한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어도 각각의 역사와 특성이 있는 다수의 언어가 공존하는 데 의미가 있다. (7쪽)
대화는 '나는 나, 당신은 당신'처럼 서로 성채를 지킨 채 상대의 말을 참고 듣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는 이야기가 평행 상태로 진행될 뿐이고 아무리 이야기를 나누어도 접점이 생기지 않는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과 나의 입장을 몇 번이고 오가다 보면 점차 전체 상이 보인다. 다시 말해 엑소포니는 어떤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한번 이동하고 끝나는 운동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동할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정신을 뜻한다. (11쪽)
나는 경계를 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경계의 주민이 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계를 실감할 수 있는 그 망설임의 순간에 언어 이상의 중요한 무언가를 느낀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얕은 영어로 하는 따분한 비즈니스 토크가 세계를 뒤덮으면 참 시시할 것이다. 나는 영어를 험담하고 싶지도 않고 프랑스어를 찬양하는 것도 아니다. 그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묘한 장소성이, 농밀한 순간이 소중하기 때문에 국경을 넘고 싶다고 느낀다. (55쪽)
어쩌면 젠더는 '성性'보다 '류流'에 가까울 수 있다. '성'은 태어나며 가진 성질이나 숙명을 가리키지만 '류'는 '이런 식으로 삽니다' 같은 행동방식이다. 내키지 않으면 물에 '흘려보내流' 잊어도 된다. '여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배워서 그런 방식으로 삽니다' 또는 '그래도 역시 그런 방식은 재미없어서 최근엔 다른 식으로 삽니다'처럼, 작품의 특징이 여류가 아니라 여류의 인간이 쓴 작품을 '여류문학'이라고 하면 된다. 여자라서 타고난 성질이나 숙명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성'이란 글자는 진의가 약간 수상하다.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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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말들 - 예스24
말들을 여행하는 소설가 다와다 요코의언어세포 자극 에세이국경 너머로, 모어 바깥으로언어와 언어 사이를 가로지르는 모험베를린에 살면서 독일어와 일본어, 두 가지 언어로 소설을 쓰는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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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와다 요코, 『여행하는 말들』, 유라주 옮김, 돌베개, 2018
우리말에 정확히 특정한 단어가 없는 'Exophony'는 넓은 뜻으로는 모어 바깥으로 나간 상태 일반을 가리키며, 모어가 아닌 외국어로 글을 쓰는 등의 창작 활동을 하는 것을 주로 말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독일로 건너가 독일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30년 넘게 독일에 거주하면서 전 세계 주요 도시들을 다니며 다문화를 겪은 일본인이 쓴, 언어와 언어 사이의 경계와 그 경계들이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에 대한 관찰기가 담긴 에세이. 언어를 역사적, 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그 언어 자체에 머무르거나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나아가 나의 것의 아닌 것과의 상호 작용을 '대화'이자 '모험'이라고 여길 수 있는 저자의 개방적이면서도 성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태도와 시선에 겸허해지는 책. 올해 읽은 올해 출간된 책 중 손에 꼽을 만큼 좋았다. 언어에 있어 사람들이 흔히 신경 쓰는, 유창하고 서투른 정도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에 정확히 공감했고,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이 흔들리는 일은 반드시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그 불안과 불쾌함은 결국에는 밝은 해방감으로 변모할 것이다"(6쪽)라는 문장을 오래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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