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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머문 이야기

故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 [내 생애 단 한번]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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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세상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문장, 단어를 꾸미려 하지 않고 이야기를 숙고하여 만들어 낸 담백하고 숙연한 사색들. 책에서는 투병, 장애, 불편, 그런 단어들이 드리우는, 혹은 그럴 것이라고 여길 법한 비관적인 구석은 조금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신이 누리게 된 모든 것을 사랑스럽고 고마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그녀가 동생과 함께 명동의 옷 가게를 찾았다가 겪은 일화가 다뤄진다. 문턱이 높아서 자신은 가게 밖에서 (옷을 고르는 동생을 살피며) 기다리고 있는데, 가게 주인이 목발을 짚은 자신을 구걸하는 거지로 오인해 내쫓으려 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책에서 그녀는 "신체 장애는 곧 가난, 고립, 절망, 무지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사회에서 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의 입장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라고 적었다. 다만 그날 이후 그녀는 허름한 청바지와 티셔츠 대신 정장을 입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학생들의 체면을 위해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의 명예를 생각해 그래도 동전 구걸하는 거지로는 보이지 말아야겠기 때문이다."라고 뒤이어 이야기한다. 살면서 나는 거의 평생 겪을 일 없을지 모를 이야기 앞에서, 책을 읽다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박준 시인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10여 년 전 느낀 어느 점심의 허기를 나는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것으로 편지 훔쳐보는 일을 그만두었다."라며, 사고로 잃은 누나의, 친구와 주고받은 옛 편지를 문득 들춰보다 편지의 내용 때문에 눈물 흘렸던 대목을 소개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중에서)


장영희 교수는 2009년 지병인 암으로 돌아가셨다. 이 책은 2000년에 쓰였다. 그때 무얼 하고 있었는지조차 기억에 희미한 그 시간에, 그녀가 살아냈을 시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 역시 시인의 말처럼 아득해진 기분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내가 쓰는 글들도, 내 존재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을 언젠가의 시간이 되면 어떤 생명력 내지 의미를 지니게 될까. 이 책의 많은 부분에 나는 하이라이트를 표시했다. "'하필이면'의 이중적 의미를 생각하니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남의 짐보다 무겁다고 아우성쳤던 좁은 소견이 새삼 부끄럽다." 이 책을 아직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이 독자의 삶을 더 사랑하게 만들고야 말, "미움 끝에 용서할 줄 알고, 비판 끝에 이해할 줄 알며, 질시 끝에 사랑할 줄 아는 기적을 만드는 일"을 가능하게 할, 그런 책이라는 확신을 다음 페이지로 향할수록 굳혀가고 있다. 삶이 녹아든 글일수록 소중하다. 좋은 사람에게 알게 된 책은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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