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도 어머니도 일흔을 넘겼지만, 아직 그때는 건강하실 때였다. 언젠가 그분들이 먼저 돌아가시리라는 것은 물론 알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젠가’였다. 구체적으로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는 상황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그날, 무언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른 척했다. 나중에 분명히 깨달았을 때는, 내 인생의 페이지가 상당히 넘어간 후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신 뒤였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걸어도 걸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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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이 정녕 지나간 것이 맞는지 거기 내내 서서 소실점을 바라보다가도 할 일을 하고 갈 곳을 다시 걸어가는 날들. “늘 이렇다니까. 꼭 한발씩 늦어.”라며 버스 뒷자리에 앉아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리는 ‘료타’처럼 지나고 난 뒤에야 돌아오는 어떤 감정들의 파고를 생각한다. 다른 계절을 더 좋아하지만 많은 일들이 여름에 일어났다고 쓴 적 있다. 이 영화를, 그리고 그걸 감독 자신이 소설로 옮긴 이 책을 매번 이 무렵에 꺼내는 것도 그래서다. ‘기회 봐서’, ‘조만간’, ‘언젠가’, ‘시간 되면’이라는 말 뒤에 가만히 스러져갔던 일들.
누군가는 늘 한 걸음씩 늦고 누군가는 멀어지려 해도 가깝거나 닮아 있으며 또 누군가는 조금 앞서서 간다. 조금 앞에서 걷다 한 번씩 뒤돌아보고, 또 지치지 않게 일부러 조금 뒤에서 걷는다. 오래도록 계단에 시선을 두는 이 이야기를 그래서 생각한다. 끝내 뒷모습을 내어보이는 일과 그것을 뒤늦게 바라보는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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