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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의 말

브런치스토리 매거진 - '돈이 없어도 영화는 계속 봐야했다' - 김동진(20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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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 영화를 봤던 날들

돌아보니 'N잡러'로 살고 있다 | 2017년 12월 중순 어느 날. 그날 하루 동안의 일들이 대체로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에이전시(대행사)에서 개봉 영화의 홍보와 마케팅을 담당하는 약 2.5년 차 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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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중순 어느 날.

그날 하루 동안의 일들이 대체로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에이전시(대행사)에서 개봉 영화의 홍보와 마케팅을 담당하는 약 2.5년 차 마케터였던 나는 그때 마지막 출근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를 들면 영화 수입사나 배급사로의 이직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잘 될 거야. 나름대로 충분한 경험을 한 것 같아. 이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고 싶어.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 법한 생각들. 뭐가 그렇게 자신감에 차 있었을까? 무엇이든 잘 풀릴 거라고. 어디로든 나는 가서 또 새롭게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근거도 기반도 없이 나는 어쩐지 확신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1년 하고도 10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나는 '프리랜서처럼 보이지만 실은 백수인'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몇 군데의 회사의 면접을 보기도 했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던 나날들. 이대로 커리어가 멈추는 것인가 하는 우려 속에서도 대책 없이 신작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향했던 나날들. 그때 나는 확실한 수입이 없는 채로 모은 돈과 약간의 부수입 같은 것들로 '연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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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하마터면 이직에 성공할 뻔했다

지나고 보니 그것도 '지금'의 시작 | 호기롭게 사무실을 박차고(?) 나섰지만 퇴사 후 흔히 말하는 것처럼 수십 군데 회사에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지는 않았다. 그래도 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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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롭게 사무실을 박차고(?) 나섰지만 퇴사 후 흔히 말하는 것처럼 수십 군데 회사에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지는 않았다. 그래도 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관적으로) 여겨지거나 혹은 (이 또한 주관적으로) 상대적으로 더 가고 싶다고 여겨지는 곳을 고르느라 나름대로 돌아보자면 '몇 군데'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면접을 보았다. 양손의 열 손가락으로 꼽기 조금 모자랄 만큼의 '입사지원'을 했을 것이고, 그보다 적은 수의 회사에서 서류에 통과했다. 중소 수입 혹은 배급사의 마케팅팀이나 배급팀, 그리고 이름을 들으면 모두가 아는 할리우드 직배사의 계약직 등이다.

형편이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면접에서 떨어지고 나면 그렇게까지 낙담하지 않았다. '아, 이 회사에 갈 운명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신사, 안국, 시청, 역삼 등 장소도 다양했다. 같은 업계임에도 회사마다 면접을 보는 방식 - 그러니까 사소하게 예를 들면 면접자를 상대하는 면접관의 수, 질문의 범위와 종류, 현장에서의 과제 혹은 테스트 여부, 면접자가 본인(나) 외에 복수로 동시간대에 있는지 여부 등 - 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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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시간은 가고 잔고는 줄고 있었다

'계속할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이 옅어지던 날들 | '이직에 성공할 뻔'했다고 앞서 적었지만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그걸 다행스럽게 일어난 일이라고 여기기는 어려웠다.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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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에 성공할 뻔'했다고 앞서 적었지만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그걸 다행스럽게 일어난 일이라고 여기기는 어려웠다.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하게 될 질문.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하기를 추구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든 돈을 버는 일 자체를 더 중요시 여길 것인가. 퇴사 후 몇 개월 동안은 그리 다급하지 않았다. 어디든 입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면접을 보러 갔던 몇 군데의 수입/배급사 등의 사무실 풍경을 보면서 막연히 '그곳이 이곳이 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면접에 임하거나 해왔던 업무들에 관하여 설명하는 것에 자신이 있었고 애정도 있었으니까.

이때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지만 이후 깨달은 건 원활한 이직을 위해 직전 회사에서 얼마의 기간 동안 일했느냐도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2년 혹은 3년가량 직전 회사 근무 경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1년가량 혹은 그 미만의 직전 회사 근무 경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비해 커리어에 있어서나 직무 역량에 있어서나 회사 혹은 사용자 입장에서 더 신뢰가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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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나를 커리어 바깥에서도 ’영화인‘이게 해준 것

프리랜서처럼 보이는 백수의 시절을 지나게 한 원동력 | 단순 ‘구직자’의 신분이었다면, 부푼 희망과 낙관 속에 퇴사했으나 생각만큼의 방향으로 이직하지도 못한 채 시간(그리고 돈)을 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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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구직자’의 신분이었다면, 부푼 희망과 낙관 속에 퇴사했으나 생각만큼의 방향으로 이직하지도 못한 채 시간(그리고 돈)을 허비하고 있었다면 그 시기를 잘 보낼 수 있었을까 하고 묻는다면 이 물음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방금 말한 ‘그 시기’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프리랜서처럼 보이는 백수’. 분명 일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만나는 사람들은 흔히 “요즘 바쁘시죠?” 같은 물음을 인사로 건넸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4대 보험에 가입된 ‘근로자’로서의 일은 하지 않았지만 그 시기에도 무언가 하기는 하고 있었다. 함께 영화를 감상하고 이야기 나누는 모임을 2015년 하반기부터 해왔고 그때만 해도 수익을 얻는 활동은 아니었고 취미이자 여가의 일환이었지만 2017년 말부터는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로부터 매월 일정한 참가비를 받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건 대단한 수익이 될 리 없고 신청 대비 실제 참가율을 높이기 위한 보증금의 성격이 더 강했다. 거의 모든 모임, 강의 등의 프로그램에서 참가비가 있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즉 무료 프로그램인 경우보다 훨씬 더 참가율이 높다. 아쉽지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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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나도 이메일 뉴스레터나 써볼까?

‘영화인’이니까, 영화에 관해 쓰자는 거창한 결심 | 그래, 영화에 관해 생각하고 쓰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진정으로 할 일은 영화 글을 쓰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무렵 일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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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영화에 관해 생각하고 쓰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진정으로 할 일은 영화 글을 쓰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무렵 일종의 유행 내지는 새로운 기류처럼 보이지 시작한 것이 구독자를 모집해 이메일로 글을 써서 보내는 뉴스레터 형태의 콘텐츠였다. 지금도 시사 이슈나 기업 브랜딩, 마케팅, 신제품 등 다양한 분야의 뉴스레터들이 존재하는데 그때 다분히 영향을 받은 건 이슬아 작가가 발행하는 ‘일간 이슬아’였다. 막연한 접근이었다.

일정한 구독자이자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가 이메일을 통해 수신인에게만 전해지는 글을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일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일간 이슬아’가 최초의 이메일 연재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영향을 받아 나도 연재를 시작한다고, 알리고 싶었다. 그러한 내용을 이메일로 보냈고, 며칠 뒤 작가님으로부터 응원한다며 회신이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기적으로 이메일을 통해 마감이 있는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품이 많이 드는 일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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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영화 일이 아닌 일을 시작했다

잠시 혹은 어쩌면 계속, ’현업‘ 영화인이 아니게 된 시절 | 몇 개의 모임이나 간헐적인 원고 기고, 이메일 연재와 같은 ‘활동’을 했지만 그게 제대로 ‘일‘이 되지는 못했던 시기였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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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모임이나 간헐적인 원고 기고, 이메일 연재와 같은 ‘활동’을 했지만 그게 제대로 ‘일‘이 되지는 못했던 시기였다. 다시 일을 하기로 했다. 여기서의 일이란, 일정한 곳에 소속되어 근로계약을 맺고 ‘출근‘하는 일을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게는 ‘잠시동안만 하는 거야’ 같은 의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웃거린 곳은 2~3주 내외의 단기 인턴 채용을 연결해 주는 플랫폼이었다. 영화 PR/마케터로 일을 했으니 막연히 PR이나 마케팅 직무에서 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웹사이트에 가입해 이전 직장에서의 이력 등을 작성했다.

어느 금요일 오후, 동네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친 채 책을 조금 읽다가 한 단기 인턴 채용 공고를 발견했다. 근무 기간은 2주, 장소는 여의도. 기업의 통합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IMC가 주 업인 곳이었다. 업력이 아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국내외 여러 클라이언트를 둔 곳이었다. 회사를 가려서 지원할 상황은 아니었다. 몇 개의 공고를 흘끗 보다가 앞서 눈에 띈 2주 인턴 자리에 지원한 것이 금요일 오후, 거의 5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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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영화에 관해 쓰는 사람임을 지키게 한 사람들

‘쓰는 사람’들과의 느슨한 동질감 | 글쓰기는 혼자의 문장 노동이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 말고도 주변에 쓰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과의 상호 작용이, 홀로 쓰는 일에 영감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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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혼자의 문장 노동이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 말고도 주변에 쓰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과의 상호 작용이, 홀로 쓰는 일에 영감이나 활력을 준다. 그건 대단한 에너지가 아니라 단순히 오늘 무언가를 쓰듯 내일도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는 작은 응원에 가깝다.

2주 인턴을 지나 IMC 대행사에서 AE로 일하는 기간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대행사 라이프’로 돌아갔다. 고객사의 불규칙한 업무 요청이라든지 회사 상황상 생겨날 수밖에 없는 야근들. 어떤 날에는 자정이 넘어서 퇴근하기도 했다. 저녁 영화 모임이 예정되어 있던 날, 퇴근을 늦게 해서 모임 진행자(나)가 모임에 늦게 참석한 날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모임을 시작해 주셨던 ‘생산적헛소리’ 사장님, 고마워요!) 예매한 영화 관람 시각에 늦은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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