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해서 책이 외로움을 해결해 주는 건 아니다. 그냥 친구 삼으면 좋다는 말이다. 친구야 하나라도 더 있으면 덜 외롭고, 게다가 책은 뭐 자기 할 일이 있어서 내 말을 들어 주기에 너무 바쁘거나 오늘 애인과 약속이 있어서 나를 못 만나거나 만날 때마다 거나하게 취해야 하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같은 맥락에서 영화도, 드라마도, 유튜브도 벗 삼기 좋은 친구인 건 마찬가지다.
차이가 하나 있다면 이런 영상 매체들과는 대화를 나누기가 좀 어렵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이 친구들은 내가 뭘 말할 틈을 안 주고 자기 말만 자꾸 하는 것이다. 아니 잠깐만,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 봐, 라고 말해도 도무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간다. 나는 그게 너무 낯설어서 20대 초반까지 영화를 잘 못 봤다. 우리 이렇게 합의 없이 가는 거야? 그냥 너 할 말만 하고 가는 거야? 두 시간이고 다섯 시간이고 나를 휩쓸고 그냥 가 버리는 저 치들과 자주 만나기는 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제는 영화도 드라마도 책과 마찬가지로 내 방구석에서 멈춰 가면서 볼 수 있고 어느 정도 훈련이 되면 보는 와중에도 약간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여전히 이 친구들은 좀 쌀쌀맞게 느껴진다. 반대로 그게 위안이 될 때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니 고독한 이가 책을 벗 삼으면 적당히 대화도 할 수 있고 듣기만 할 수도 있고 자기 얘기만 할 수도 있고 언제든 멈출 수도 있다. 뭘 충전할 필요도 없고 연결할 필요도 없으면서도 그 무엇보다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이 믿음직한 벗은 여전히 나만큼 느려서 나의 고독을 안심시킨다. 근현대의 어느 쪽방에서, 중세의 수도원에서, 고대의 왕실에서 책을 읽던 사람의 등과 우리의 등이 겹쳐지므로 우리는 조금 덜 외로워진다.
-김겨울, 『책의 말들』에서 (유유, 2021,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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