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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밖에서

'조제'와 '츠네오'를 보면서, '좋은 이별'에 대해서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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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좋은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지난 날의 일들을 안주 삼아 거닐었던, 그 대화의 답은 '과연 그런 게 어디 있겠냐'는 것이었고 대화의 주된 화제는 그것 자체가 아니라 거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것이었지만, 며칠 동안 나는 그 단어에 대해 더 생각했다. 좋은 이별. 이별은 좋은 것일 수 있는가. 평생에 사랑은 단 한 번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어도, 헤어짐은 겪기 힘든 것이며 가능한 겪고 싶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기도 전에 '헤어지면 어떡하지' 싶어지는 그 불안을 나 역시 헤아릴 수 있다. 그러니 질문을 조금 고쳐 적어야 하겠다. 이별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태도, 혹은 가장 좋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태도는 과연 무엇일까. (...)


(중략)


(...) 지나간 사랑을 돌아볼 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랑에 실패했다"라고. 만약 이 문장을 "나는 그 사랑에 실패했다"라고 적는다면, 그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내가 만약 당신과의 사랑이 평생 지속되기를 꿈꿨다면 그것은 달성되지 못한 꿈일 테니까. 하지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면서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었다면, 앞의 문장을 나는 이렇게 고치겠다. "나는 그 사랑을 겪는 데 성공했다"라고. (이는 "나는 그 이별에 성공했다"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다소 과격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좋은 이별'임을 누구나 수긍하게 할 만한 단 하나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이별'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후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이별'은 방식이 아니라 그 이후의 나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관한 것이다. 사랑이 끝난 후 얼마간은 분명 더 외롭겠지만, 나는 다시 '다음'과 '우리'가 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이는 '조제'와 '츠네오'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다. '츠네오'는, 자신이 이별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조제'는, 자신이 사랑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츠네오'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난간에 몸을 기댄다. 집에서 요리를 하던 '조제'는 또 넘어진다.


그러나, 내가 넘어진 자리가 여기라는 바를 아는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막연한 환상에 기대지 않은 채 나에게 '다음'이 분명 없지 않을 것임을 믿는 한, 나는 앞으로도 넘어진 곳에서 다시 몸을 일으킬 것이다, 비록 상처투성이라 할지라도.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당신 역시, 넘어져 있다면 꼭 다시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한다.



원문: https://brunch.co.kr/@cosmos-j/303 에서


(2018.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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