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쳐 쓴다는 것의 의미는 바탕을 완전히 지우고 처음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내 삶은 이렇게 평생 '남들처럼'도 못 되고 하고 싶은 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저 불행하기만 할 거라고 주저앉는 대신, 내가 앉은 자리가 과연 어디인가를 치열하게 둘러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없던 것을 고쳐 쓰는 게 아니라 있는 것에서 조금 다른 방향을 찾아내는 것이다. '학수'와 '선미'가 영화 <변산>에서 보여주는 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포장이 아니라 날것의 존재다. '넌 있는 그대로 무조건 괜찮아'가 아니라, '넌 여기까지가 아니라 조금 더 멀리 걸을 수 있어'인 것이다. 영화 중반 '학수'와 '선미'가 길을 걷다 만나는 어느 버스킹 뮤지션의 노래엔 이런 가사가 등장한다. '이 노래 사랑 노래 / 멍든 내가 부르고 있네 / (...) / 목 놓아 부르는 노래' 멍 들어본 사람은, 아픔을 앓아본, 아픔을 알아본 사람은 사랑을 더 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는 것도 마찬가지리라. 주저앉아본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다시 일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손도 잡아줄 수 있겠다.
'학수' 역을 연기한 배우 박정민은 자신의 책 [쓸 만한 인간]에서 이렇게 말해놓았다.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나도 각도 큰 변화구를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도 앞으로 계속 살아가시길 바란다. 직구만 던지면 얻어맞기 일쑤니, 적절히 변화구도 섞어 가면서 살아가시길 바란다. 사는 데 9회말이 있는가. 역전패 같은 것도 없을 것이다. 당신도 누군가에게는 의외로 잘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길 때까지 그렇게 계속 살아가시길 바란다. 당신 지금 아주 잘하고 계신 거다." (65쪽, 상상출판, 2016.) 내게는 노을 밖에 없다고 여겼던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곧 전부가 될지도 모르니까. 삶에 행복만 있다는 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따금 행복도 그 빛을 드러내리라는 건 진실이다. 청춘은 이름처럼 아름답지 않겠지만, 내가 선 이 자리에서 끝 모른 채 자신의 이야기를 고쳐 쓰고 끝없이 계속 살아봐야만 하는 이유는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당신의 이야기도 멈추지 않고 계속 쓰였으면 좋겠다. (★ 8/10점.)
<변산>(2018), 이준익
2018년 7월 4일 개봉, 123분, 15세 관람가.
출연: 박정민, 김고은, 장항선, 고준, 신현빈, 정규수, 김준한, 정선철, 배제기, 최정헌, 임성재 등.
제작: 변산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제공/배급: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브런치 무비패스 관람(2018.06.26 메가박스 동대문)
글 전문: https://brunch.co.kr/@cosmos-j/306에서.
(2018.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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