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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머문 이야기

주말에 만난 김연수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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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물론 서씨라는 사람에 대해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 굉장히 모호하고 시시때때로 엇나가는 감정이다. 이제 그는 서씨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 그는 분명히 이상의 데드마스크를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서씨였다. 이관장도 인정하지만, 서씨로서의 그에게서 우리는 어떤 부조화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완벽하게 이상 숭배자를 형으로 가진 서씨라는 인물을 흉내냈다고 하더라도 그는 바로 서씨 자신이다. 왜냐하면 이상에 대해 말할 때의 그 뜨거움을 그토록 흉내낼 수 있다면, 그를 가짜라고 일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뜨거움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확인할 길이 이제 사라졌지만, 그런 종류의 뜨거움이라면 누구도 진위를 가려낼 수 없다. 만약 어떤 배우가 완벽하게 무대 인물로 바뀌었을 때, 우리는 그 무대 인물에게서 배우를 분리해낼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그 무대 인물을 가리켜 가상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상의 존재라고 지적하는 사람은 무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무대 위에서 그 배우는 사라진다. 내가 경험한바, 서씨는 가장 완벽하게 구현된, 데드마스크의 전달자였다."

김연수, 『꾿빠이, 이상』

 

"제2의 천성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제3의 천성도 가능하다. 그리고 제3의 천성이 가능하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그저 양을 잊을 정도로 어떤 소설에 푹 빠졌을 뿐인데, 어느 틈엔가 내가 그 소설 속의 주인공과 비슷해지는 일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권의 책을 읽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누군가 말한다고 해도 비웃을 수만은 없지 않을까? 더구나 양을 잊을 정도로 어떤 책에 푹 빠져본 적이 없다면. 또 하나, 다행인 것은, 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나의 배역을 정하는 건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가능하면 멋진 배역을 맡기를. 물론 그러자면 먼저 양을 잊을 정도로 뭔가에 빠져야 하겠지만."

김연수, 『시절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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