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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서 결정하자고." (I guess we can decide along the way.)
영화 <쓰리 빌보드>(2017)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어디를 향하여 이어질지 아는 채로 걸어가는 사람이 있을까. 수 십 수 백 번도 더 가 본 집 앞 편의점과 집 사이의 길이라든지 출근길 지하철역 출구를 나선 뒤부터 회사 앞까지의 길 같은 것이야 알겠지만 그건 누적되고 반복되어 온 경험과 감각으로 인한 것일 테고 인생의 오늘과 내일 사이의 길에 관해서라면 삼천 년 뒤의 일까지도 미리 '기억'하는 영화 <컨택트>(2016)의 '헵타포드' 종족이 되지 않는 한 예지 할 도리가 없다. 나는 헵타포드족이 아니라 그냥 휴먼이어서.
명백히 그건 인간의 한계이자 굴레와도 같은 것이겠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는 모르는 채로 일단 걸어보겠다고 생각했던 그 길이 바로 이 길이라서 고맙거나 다행이다 싶어 질 때가 있다. 내게 그중 하나는 블로그를 하기로 작정했던 것이었다. 2013년 7월 10일.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에 관해 썼던 블로그 첫 번째 글에서 나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무언가는 과거의 어떤 것으로 인해 발생하였고, 지금의 나의 행동이나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또다시 미래의 다른 일들의 단서/원인이 될 것이다."
8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과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스쳐 지나가는 내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쌓여서 나의 기분 좋은 하루를 이루는"(이동진, 『밤은 책이다』에서 변용*) 면도 있지만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라는 건 대체로 시간이 흐른 뒤의 생각이지 순간의 감각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해도 나는 지금밖에는 감각할 수 없다. 노트에 펜으로 한 획 한 획을 적을 때 노트와 펜 사이의 마찰과, 머그에 담긴 식은 커피가 입술에 닿을 때의 차가운 느낌, 아니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에서 들려오는 근처 다른 손님들의 테슬라 주식 이야기 같은 것.
마틴 맥도나 감독의 영화 <쓰리 빌보드>(2017)는 "가면서 결정하자고."라는 마지막 대사로 '밀드레드 헤이스'(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내비친다. 그는 자신이 결정한 어떤 일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그가 운전하는 차에 동승한 옆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길에 들어선 이상 자기 결정이 괜찮은 결정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단 멈추지 않고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가보기 전에는 모를 것이다. 막다른 길인지 또 다른 어디론가 이어지는 길인지.
8년 전 그날 첫 블로그 포스팅을 올리던 나와 KF94 마스크를 쓴 채 카페에 앉아 있는 지금의 나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때가 8년 전이 아니라 2년 전이었어도, 그 글이 블로그가 아니라 나만 보는 몰스킨 노트에 쓰인 것이었다 해도 2021년의 김동진은 뭔가를 쓰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 그 순간의 작정이 괜찮은 작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지금의 기분이지 그때의 감각이 물론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때 그 글을 쓴 나'가 걷기 시작한 길 덕분에 여기 있다고 믿는다.
어떤 영화는 그것이 너무 인상적인 나머지 삶을 다시 사는 기분을 들게 한다. 그건 글도 마찬가지다. 어떤 글을 쓰고 나면 '그 글을 쓴 나'로 살게 된다. 내가 쓴 글 대부분은 내 생각과 감정에 충실했으면서도 동시에 영화나 드라마, 책의 이야기들을 빌린 채 쓰였다. 영화 <쓰리 빌보드>를 극장에서 처음 관람한 날은 2018년 3월 5일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그 영화는 이후 극장에서 세 번 더 관람했고 저 마지막 대사는 스마트폰 케이스 뒷면에 새길만큼 내게 각별한 모습으로 단단한 말이 되었다. 그 말을 만난 지 3년 하고 하루가 된 날이 오늘이다.
그로부터 어제가, 마음산책에서 보내준 마음산책북클럽 2021 노트를 받은 날이었다. '김동진의 말'이라는 글자를 처음 눈으로 받아 읽었을 때의 그 낯섦과 떨림 같은 것이, 그리고 저 글자에 관해 어떤 이가 해준 이야기가, 지금 이 글을 쓰게 했다. 이다음 장의 글 역시 무엇이 쓰일지 아마도 모르는 채 그러나 순간의 감각으로 분명히 쓰일 것이다. 노트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 어떤 내가 되어 있을지 거기 무슨 이야기가 있을지. 지금처럼 가면서 결정해보겠다. (2021.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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