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300페이지를 읽는 일. 40분짜리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일.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일. 미술관 내부를 아주 천천히 걷는 일. 그러는 동안 나의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고 마음을 활짝 열어두는 일. 그럴 때 왠지 인류의 일원이 되었다고 느낀다. 표현하고 경청해온 사람들의 커뮤니티에 한 발짝씩 다가선다고 느낀다. 이 바쁜 세상에서 시간을 견디는 인내심이란 진화에 불리한 성정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인내심이 없다면 내가 꿈꾸는 다정한 사람들의 세계는 그 꿈의 흔적조차 파르르하게 사라질까 두렵다."
-김겨울, 『겨울의 언어』, 웅진지식하우스, 2023, 52쪽
"몸과 글은 지독히도 고집스럽다. 지금도 힘겨운 날이면 쩨쩨하게 그 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린다. 도대체 뭐가 남는 거냐고. 이 헛수고의 소용은 무엇이냐고. 메아리 대신 천 번 실패한 증거들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해준다.
우리는 아주 느리고 깜짝 놀라울 정도로 비효율적이야. 그러나 분명히 너를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어."
-김소미, 『불이 켜지기 전에』, 마음산책, 2025,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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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분야에서 오래 읽고 쓰고 말하며 생각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면 어쩐지 벅찬 기분이 된다. 고된 시기에 언제나 노래나 문장이나 영화에 의지하듯 어떤 '결기'를 가지고 자기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성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말과 대화를 듣는 일은 내게 아직 더 많은 배움과 이해의 영역이 있다는 실감을 준다. 동시에 이 영화라는 산업과 일에 대해서 제법 비슷한 생각과 감각을 하고 있기도 하다는, 느슨한 의미의 연대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좋아하는 필자들의 토크에 평일 저녁 퇴근 후 굳이 시간을 들여 걸음 하는 일도 비슷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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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 가고 이미 지나간 영화를 몇 번이고 생각하는 일은 그저 일상과 비일상의 작은 경계를 오가는 일에 불과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약간의 숭고한 면이 있다고도 종종 생각한다. 책도 마찬가지다. 실용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것만 같은 일에 자발적으로 몰두하고 (기자님 표현을 빌려) 수 만 시간을 살아온 세계보다 불과 두어 시간 만난 이 세계에 불이 켜지고 나서도 여전히 젖어든 채 현실에 복귀하기를 어떻게든 유예하려는 마음이 내게는 쏜살같이 자극을 휘발시키고, 이해되고 편리한 것만 찾는 일보다는 조금 더, 아니 훨씬 더 추구하고 싶은 쪽이다. 모든 영화의 모든 장면이 애쓰고 있는 것처럼, 살아본 적 없고 살아볼 일도 없을 삶과 세계를 체험하는 일에 대해 더 성실히 공을 들여 헤아리고 싶은 마음. 정말 "어둠 속에서만 가능한 빛"을 나는 찾고 꺼뜨리지 않아야겠다. 나는 분명 앞으로도 몇 번이고 흔들리고 길을 헤맬 것이지만 저 마음이 지탱하는 세계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202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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