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낙하산 없이 허공으로 던져진 사람 같아
너는 믿음을 잃어버려서 매달려 있는 줄도 모르고
겨울 해변에 혼자 떨어져 앉아
바다 너머 모국어를 두고 온 사람 같아
너는 울음소리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집이 나올 때까지 집 안을 맴돌다가 가출했다고 했다
사방이 벽인 거대한 액자 속에서
그건 유체이탈을 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너를 거울 속에 담그고 땟국물을 씻어주고 싶다
얼굴에 낙서를 하면 영혼은 돌아올 수 없다는데
어설픈 엄마 냄새가 난다
뿌옇게 겉도는 비릿한 화장 냄새
한줌이 되어 돌아온 매캐한 화장 냄새
악몽을 꾸는 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기도해줄 때만
나는 엄마가 만져졌다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도 악몽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엄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망을 봐준다면
너의 주머니에도 너만의 비밀을 훔칠 수 있을까
너는 엄마를 잃어버려서 아직 소녀인 줄도 모르고
이인조가 되어 한쌍의 날개가 된다면
우린 더 많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악몽을 뚫고 베개를 들고 다니는 밤의 유목민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무릎을 내려놓으면 안 될까
너는 불안을 잃어버려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시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까지
너의 일기장에 무뎌진 손을 얹고 기도하듯 이야기를 이어 쓸 때까지
봄이 오는 숲속에 함께 누워
양 한마리 양 두마리 구름이나 세면서
빨간약을 바르는 꽃나무들이나 보면서
그러면 뼈끝에서 손톱이 돋아나고
어느 날 몸속에서 눈을 떴을 때 긴 꿈을 꾸었다고 돌아볼 텐데
너는 손을 놓쳤을 뿐 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공을 떠도는 텅 빈 영원 속에
혼자 남겨질 너를 두고
죽지 말아요
오늘은 죽지 말아요
*그러나 한 소녀가 죽었다. 이 시를 세상에 흘려보내고 얼마 뒤였다. 얼굴도 희미해진 그애가 꿈에 나왔던 날 부고를 받았다. 집을 나온 후 우울증이 심했다고 한다. 시를 너에게 주었다면 시는 붙잡을 수 있었을까. 다만 한 사람.
-이민하, 「제너레이션」, 『우울과 경청』(창비, 2025)
728x90
반응형
'책 속에 머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하림, '일본 광고 카피 도감'(서교책방, 2026) (1) | 2026.02.11 |
|---|---|
| 나희덕 시 '이 숟가락으로는' (1) | 2026.02.06 |
| 은유, '아무튼, 인터뷰'(2025) (0) | 2025.11.21 |
| 김소미, 김겨울, 영화관의 어둠둠 (0) | 2025.11.06 |
| 테일러 스위프트의 모든 앨범들을 망라한 소장가치 높은 책(소우주출판사) (0) | 2025.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