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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김연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2020, 문학동네) 발췌 "그 도시는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청춘과 꿈을 묻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 청춘과 꿈의 이야기가 있기에 어떤 폐허도 가뭇없이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15쪽)"혼잣말처럼 기행이 말했다. 그건 어쩌면 불행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불행에 끌렸다. 벌써 오래전부터, 어쩌면 어린 시절의 놀라웠던 산천과 여우들과 붕어곰과 가즈랑집 할머니가 겨우 몇 편의 시로 남게 되면서, 혹은 통영까지 내려가서는 한 여인의 마음 하나 얻지 못하고 또 몇 편의 시만 건져온 뒤로는 줄곧. 기행을 매혹시킨 불행이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 더보기
주말에 만난 김연수의 문장들 "지금은 물론 서씨라는 사람에 대해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 굉장히 모호하고 시시때때로 엇나가는 감정이다. 이제 그는 서씨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 그는 분명히 이상의 데드마스크를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서씨였다. 이관장도 인정하지만, 서씨로서의 그에게서 우리는 어떤 부조화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완벽하게 이상 숭배자를 형으로 가진 서씨라는 인물을 흉내냈다고 하더라도 그는 바로 서씨 자신이다. 왜냐하면 이상에 대해 말할 때의 그 뜨거움을 그토록 흉내낼 수 있다면, 그를 가짜라고 일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뜨거움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확인할 길이 이제 사라졌지만, 그런 종류의 뜨거움이라면 누구도 진위를 가려낼 수 없다. 만약 어떤 배우가 완벽하게 무대 인물로 바뀌었을 때, .. 더보기
문화예술의 가치에 관한 짧은 생각: 어떤 행복은 크고 확실하다 (2018), (2017), (2013) 등으로 알려진 배우 채드윅 보스만이 얼마 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에 영화계 관계자들과 동료는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했던 건 단지 그가 스타였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그가 출연한 영화를 재미있게 즐기는 것을 넘어 스크린 바깥에서의 직업인으로서의 면모에 호감과 매력을 느끼고 그의 커리어를 응원했다. 스타의 팬은 그의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 기대감을 갖고 그것을 열렬히 함께한다. 국적을 불문하고 배우나 가수를 좋아한다는 일에 관해 말하는 건 별로 특별하지도 새삼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취미와 애호의 범주를 넘어 그것이 삶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하면 어떨까. 사소하게는 영감의 원천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생존 자체에.. 더보기
삶의 핍진성을 만드는 일 문학 용어 중에 '핍진성'이라는 게 있다. 이 개념에 대해 소설가 김연수의 산문 『소설가의 일』에는 "서사적 허구에 사실적인 개연성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수용하는 관습화된 이해의 수준을 충족시키는 소설 창작의 한 방법으로, 구체적으로는 동기 부여나 세부 묘사 등의 소설적 장치를 들 수 있다."고 소개된다. (문학동네, 2014) 이는 개연성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말이다. '그럴 수 있는' 정도와 '정말 그런' 정도는 다르기 때문. 한자(逼眞性)로도 영문(verisimilitude)으로도 어렵게 다가오는 이 말이 영영사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The appearance of being true or real." 삶에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어떤 일을 "이제부터 할 거야"라고 말할 때 개연성이 있는 .. 더보기
[1인분 영화] 9월호 12 - 아워 바디: 달리고 있고, 지금 달린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1인분 영화] 9월호 열두 번째 글은 에세이 - '달리고 있고, 지금 달린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영화 에 대해 썼다. 8년 동안 고시 공부를 한 주인공 '자영'(최희서)이 어느 날 동네에서 만난 '현주'(안지혜)라는 인물로 인해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일상의 변화를 겪는 내용의 영화. 이번 주에 개봉한 영화 가 어떤 작품이었는지 간단하게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한데 이 영화 역시 줄거리만으로 축약하기엔 좀 무리가 있다. 무기력하게 공부만 하던 주인공이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도 맞고 그로 인해 일상이 달라지는 것도 맞는데,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역시 영화를 직접 봐야 한다고 쓰고 싶지만, 일단 '달리기'라는 소재 자체에 주목하면서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떠올리려 한다. 내게 달리기 하.. 더보기
영화 글쓰기 클래스 '써서보는영화' 2월의 첫 날 @관객의 취향 [관객의 취향]에서 진행하는 '써서보는영화' 2월의 첫 시간이었던 오늘. 매 시간 강의자료를 준비하고 (나의 지난 글을 포함한) 참고할 만한 글을 유인물로 만들어 공유하는데, 종종 영화를 바꾸거나 글을 바꾸는 편이지만 첫 프린트의 첫 글은 계속해서 바꾸지 않고 있다. (2017)에 관해 2018년 5월 28일에 쓴 글. 글의 도입부를 시작하는 방법에 관해 설명하며 인용한 그 글의 첫 문단은 이렇다. "(2017)를 보고 글을 쓰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분량은 중요하지 않다. (긴 글을 쓰는 게 어렵다고 해서 짧은 글을 쓰는 일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쓴다는 건, 반드시 어려운 일이다. 문장을 짓고 단어들을 고르는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자라 할지라도, 글을 쓰는 사람인 이상 그는 계속 써..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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