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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적끄적

5,000개의 에버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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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주로 쓰고 있는 기록 도구인 ‘에버노트’의 첫 번째 노트는 2012년 7월 12일에 쓰였다. 마지막 노트는 2021년 4월 17일에 쓰이고 있다. 노트의 수가 총 5,016개를 가리키고 있으니 산술적으로는 하루 평균 1.56개의 새 노트가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실질적으로 영화 기록을 처음 시작한 건 2013년 7월부터의 일이므로, 이 수치에는 약간의 부풀려짐이 있다. 게다가 다수의 노트는 별 쓸모없는 일기에 가깝거나 책에서 읽은 말들을 옮겨 담아두는 등 직접 쓰지 않은 것도 포함된다. 그렇다 해도, ‘새 노트’ 버튼을 누르는 오천 하고도 열여섯 번의 행위들이 결국 지금의 내 일부이자 어쩌면 거의 전부에 가까운 무엇이지 않을까.

첫 번째 노트는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리더스북, 2011)에서 한 대목을 메모한 것이다. “침묵은 충동에, 감정에, 유혹에 흔들리는 나를 관찰하고 경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침묵의 순간 세계에 대한 사색이 시작된다. 침묵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 이상이며, 관성에 의한 모든 행위를 멈춘다는 의미다. 그래서 타인과 외부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열정이다.” (31쪽)

자신이 남긴 수많은 기록들은 결국 그 자신을 정의하는 요소이자 조각들이며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구성하거나 규정한다. 어떤 책을 읽었고 누구를 만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요즘은 기록 행위에 있어 양적 측면보다 질적으로의 성장이 스스로에게 필요하다고도 자주 생각하지만, 어떤 경우와 분야에 따라서는 양 자체가 곧 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믿음을 여전히 갖고 있다.

그러니 5,016개의 노트들이 나를 그 기록들이 쓰이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나로 만들어낸다. 이건 곧 살아가는 방식이자 태도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늘은 정혜윤의 책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아무튼, 메모』(위고, 2020)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때의 노트들은 이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메모들은 지금의 내 삶과 관련이 깊다. 나였던 그 사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에 노트에 쓴 것들이 무의식에라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어느 날 무심코 한 내 행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믿는다. 이게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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