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크 크레이지>(2011)를 시작으로 드레이크 도리머스 감독의 영화들은 모두 언뜻 봐도 '사랑 영화'였다. <뉴니스>(2017)나 <조>(2019), <엔딩스 비기닝스>(2019) 등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다루는 방식과 관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시간과 기억의 흐름을 중심으로 (주로 남녀의) 사랑을 탐구해온 영화들을 만들었다. 2015년작인 <이퀄스>는 필모그래피의 위치상으로도 거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SF의 양상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직 만나본 적 없고 도래하지도 않은 세계를 판타지의 요소도 가미해서 치밀하게 구성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그리 낯설지 않은 현대적인 풍경 속에서 현재를 사는 관객이 몰두해보고 고민할 만한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2013) 속 손편지 대필 작가 '테오도르'(와킨 피닉스)의 경우라든지, 혹은 <블랙 미러> 두 번째 시즌(2013) 2화 '돌아올게'의 죽은 연인을 꼭 닮은 인형이라든지. 아니면 알렉스 가랜드의 <엑스 마키나>(2015)에서 다뤄진 인공지능에 관한 물음 역시 당시 기준으로도 아주 낯선 화두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퀄스> 역시 후자에 해당된다. 정확히 연대가 제시되지는 않은 미래, 인류는 대부분의 공간이 황폐해진 지구에서 살아남고 우주를 개척하기 위해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라고 여겨지는 감정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직업군 등에 따라 분류된 유니폼을 입고 정해진 식사를 하는 사람들. 대중교통에서 그들의 눈이 향하는 디스플레이에서는 다양성을 제거한 듯 똑같은 정보가 출력되고 있다. 영화 초반 손목의 생체 정보를 인식하는 출입 게이트에서 주인공 '사일러스'(니콜라스 홀트)가 다른 '이퀄스' 여성에게 베푸는 친절 역시 적어도 <이퀄스>의 세계에서는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거나 그것이 허락되지 않은 기계적 배려에 불과해 보인다.
제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이퀄스'는 평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거의 말살할 세계를 뜻한다. 인류는 우주를 개척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성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거나 극복해야 하며 그것은 사랑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감정이다. <이퀄스>의 세계에서는 화장실도 성별 구분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콜렉티브'에서 만든 일종의 감정 억제제를 투여받으며 그들 사이에는 어떤 유대나 교류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설정을 다수의 관객들은 이미 영화 <이퀼리브리엄>(2002)에서 본 적 있을 것이다.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존 프레스턴'을 중심으로 이 영화는 주로 감정이 통제된 미래 사회를 시스템 측면에서 바라보며 그림이나 서적을 불태우는 등 문화 예술을 통제하는 사회상이 다뤄진다. 좀 더 이전으로 가볼까. 1953년에 쓰인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은 책을 불태우는 것이 직업(방화수)인 '가이 몬태그'(이 이름은 블리자드사의 PC RTS 게임인 '스타크래프트'(1998)에서 화염방사기를 쓰는 유닛의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가 주인공이다. 비판적인 생각을 낳는다는 이유로 책을 소지하거나 읽는 일이 금지된 사회가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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