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장면들과 크레디트가 다 지나고 나서야 나오는 "모두들,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춘희'가 만나는 순간의 내레이션으로도 "춘희야,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말이 편지처럼 발화된다.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2020)가 전해주는 이 다독임이 그 자체로 새롭지는 않겠다.
<태어나길 잘했어>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과거와 현재의 '춘희'(박혜진, 강진아)가 만나는 방식이 단지 며칠의 봄꿈처럼 환상에만 젖어 있지 않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사랑스러운 장면들로 가득한 가운데서도 1998년 '춘희'에게는 갖가지 아픔의 순간들이 눈에 띈다. 반 친구들도 교사도 친척들도 '춘희'에게는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현재의 '춘희'에게도 모든 것을 바칠 것처럼 "지켜주겠다"며 다가오는 '주황'(홍상표)의 존재는 오히려 그를 밀어내게 만든다. 마늘을 까는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현재의 '춘희'에게 사촌 오빠로부터 주거에 관한 현실적 문제가 밀려오는 사이 혹은 과거의 '춘희'는 스스로를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이었던 것처럼 인식하고 위축돼가는 듯 보인다. (다한증이 있는 그는 평소에도 땀이 많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더욱 그렇다.)
현재의 '춘희' 일상에 변화를 주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벼락을 맞은 뒤부터 과거의 자신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앞의 일로 찾아간 상담 모임에서 '주황'을 만나는 일이다. 유년의 상처로 말을 더듬는 '주황'은 얼핏 '춘희'와 꼭 맞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변을 스스로 밀어내고 외롭게 있기를 택해온 '춘희'에게 관계는 쉬운 일만이 아니었고, 풋풋하고 다정한 순간들 뒤로 어떤 가능성을 남긴다. 더 중요한 건 앞의 것, 즉 스스로의 과거와 대면하는 일이다. 그 누구와도 가깝기 쉽지 않을 때 보듬어야 할 것은 타인이나 외면이 아니라 내면의 자신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지난날의 자신을 만날 일이 있게 된다면 그때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자신에게 보이는 답답한 면이나 자기만 아는 약점이 있을 것처럼 과거 시점에서 보는 미래의 자신도 어쩌면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한마디 말보다 그저 눈을 바라봐주고 두 팔 벌려 다가가 안아주는 것이 그날이 있게 된다면 해야 할 행동인 건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과거의 자신을 대면한 '춘희'는 그래서 오히려 '주황'에게 "과거의 자신을 만나면 뭐라고 해주고 싶어요?"라고 묻고 거기 "안아주고 싶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
https://brunch.co.kr/@cosmos-j/1407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45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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