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엔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나'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
말을 하기 전에 그 개요와 다음에 이어질 말 따위를 몇 가지 생각해두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자 천성이기도 했다. 상대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어떡할지, 썰렁해지거나 정적이 흐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만약을 가정하는 것도 그렇고, 의도하고 예상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으면 당황하고 식은땀이 나는 것도. 영화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2020)의 주인공 '아드리앵'(벤자민 라베른헤)의 모습을 보면서, "항상 내 세계에 갇혀 있고 산만하며 머릿속에서 딴생각을 하던 아이였다"라며 스스로에 대해 고백한 로랑 티라르 감독의 인터뷰를 보며, 어쩐지 낯설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애인이 잠시 시간 좀 갖자며 관계의 휴식을 선언한 지 38일째, 잘 지내냐는 문자를 보냈고 상대가 그것을 읽었지만 '아드리앵'은 답장을 받지 못해 전전긍긍해 있다. (소위 '읽씹'과 '안읽씹'의 차이가 있겠지만 어떤 경우든 상대가 답장을 하지 않는 상황은 초조함을 줄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웃으며 일상적인 농담을 주고받지만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는 가족과의 저녁식사 중에도 애인 '소니아'(사라 지로도)의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아드리앵'에게, 결혼을 앞둔 누나가 축사를 부탁한다. 안 그래도 자신이 '소니아'에게 했던 말들과 그에 대한 반응,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여러 상황들을 복기하고 있던 '아드리앵'에게 그 순간 부담스러운 숙제가 하나 늘어난다. 자신의 재미없는 농담으로 싸한 분위기가 되는 결혼식장 모습을 떠올리고, 어떻게 하면 축사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상상하다 누나와 예비 매형이 결혼식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가정까지 하는 '아드리앵'은, 영화 내내 관객에게 말을 건다.
"나만 그런가요?"라며 말을 거는 주인공 '아드리앵'
보이지 않는 벽을 깨고 영화 속 인물이 관객을 향해 (카메라 정면을 응시하며) 말을 하는 것은 대체로 거리감, 즉 체험하듯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관객 자신이 '영화'를 보고 있음을 느끼게 만든다. 캐릭터에 이입하는 게 아니라 멀찍이 간격을 두고 그의 행동을 관찰하게 만드는 일. 그래서 이를테면 <데드풀>(2016)에서처럼 유머러스한 효과를 만들면서 캐릭터의 독특한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데 적합하다.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에서도 이 '방백'의 활용은 영화가 코미디에 중점을 둔 만큼 비슷한 효과가 있는데, 상술한 이유로 이 영화의 '아드리앵'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은 프랑스 소설가 파브라스 카로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감독에 따르면 원작의 독자들 사이에서도 "주인공이 짜증 난다"라는 부류의 반응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각색의 방향은 자연히 그 특색을 살리면서도 관객이 상영시간 동안 캐릭터를 지켜보는 일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책은 읽다가 언제든지 덮을 수 있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고 한 호흡으로 보는 것'이 핵심인 매체이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 내내 '아드리앵'은 매형이 각종 지식들을 꺼내며 잘난 체 하거나 아빠가 수십 번도 들었던 자기 어릴 적 이야기를 꺼내거나 할 때마다 그 자리가 지루하다는 듯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건다. 스스로의 회상에 따른 고교 때의 행동(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집착적으로 볼펜을 선물하는 일)이나 자신이 상상하는 결혼식 축사에서의 이야기 등은 소위 짜증을 유발할 수 있을 만큼 '비호감' 주인공이 되기 쉽지만, 빈번한 독백은 오히려 '아드리앵'을 불쌍하게 보이게 만들기도 하고 영화의 흐름을 잠시 '휴식'하며 '아드리앵'의 내면을 엿보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그럴 수 없지만 관객은 그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방백을 하느라 가족들과의 '실제' 대화 흐름을 잠시 놓치기도 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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