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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적끄적

이 끝은 얼마만큼의 과정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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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무르익은 계절보다는 계절과 계절이 바뀌는 무렵 그 사이와, 실내외의 온도차가 클 무렵이 나는 언제나 편치 않았다. 그러나 괜한 의미를 이곳저곳에 부여하지 않기로 하고, 나만 대단한 시련을 겪는 사람인 척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힘들 때 찾아 들었던 노래들과, 숨어 들었던 시들을 다시 꺼내는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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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 

내 가장 아픈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이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아니길 바랍니다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의 손을 놓아준 힘만큼 

당신도 누군가의 손을 가장 큰 힘으로 잡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류근, '祝詩'

(문학과지성 시인선 489 『어떻게든 이별』)


언젠가 모임 때 인용한 적도 있는 이 시의 제목은 '축시'다. 한자 '빌 축'은 '저주할 주'로도 드물게 쓰인다고 한다. 맙소사. 나는 그런 나쁜 마음은 억지로 먹으라고 해도 어렵다. 지나간 건 가능하면 너무 미화되지 않을 만큼만 아름다웠으면 하니까. 그럼에도 나는 신형철과 김연수의 문장들을 대신 떠올리기로 한다. 말장난 같지만 지금이 지금으로 다가오는 건, 단지 지금이어서 인지도 모른다. 나는 다가오지 않은 영원보다는 늘 곁에 있는 불확실함을 믿는 사람이어서, '끝났습니다'라고 단언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더 걸리겠지. 정말로 '끝의 끝'인지 '끝의 시작' 같은 것인지. 가능한 고요하게, 내게 당장 필요한 건 심플해지는 지혜와 편안해지는 용기, 이리라. 여전히 내게 부족한 것.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찾아왔대도 그게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는 것이라오." (김연수, 단편 '벚꽃 새해',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문학동네, 2013)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을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201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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