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이 내가 사로잡힌 것을 대수롭지 않게 만들거나 가려주지는 않는다. 책방에 언제나 내가 직면한 상황이나 감정보다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책방 안쪽의 일들은 책방 바깥의 사정보다 대체로 아기자기하다. 그런 말랑한 데서 오는 힘이 있는 걸까. 업계 밖 사람들에게 책방은 낭만보다 30퍼센트의 수익으로 굴러가는 곳이라고 짠내 나게 말하지만 솔직히 내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 중 가장 푹신하다는 점에서 나를 적당히 내던지기 좋은 곳이 된다. 네모반듯한 공간에 네모난 책들로 빼곡한 책방은 의외의 탄성을 지녀서 그곳으로 들어서는 나를 매일 한 번씩 튕겨낸다. 처음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불안한 설렘, 낯선 떨림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책방을 운영하는 해가 거듭되어도 그 ‘약간의 들뜸’은 여전했고, 이제 나는 그걸 ‘가장 작은 단위의 내가 되는 느낌’으로 받아들인다. 비대해진 나를 털어낼 때마다 어깨 위에 붙어 있던 근심과 고민도 기댈 곳을 잃고 잠시 물러난다. 그러면 나는 작은 나로서 할 수 있는 사사로운 일들 -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사람들과 시시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는 - 을 한다.”
-윤혜은, 『매일을 쌓는 마음』에서, 오후의 소묘, 2024,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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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계속 거기 있는' 이야기다. 영화로 말하자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영화 속 인물들은 거기 계속해서 남아 살아가던 삶을 (영화가 시작하기 이전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으리라 믿어지는 영화 같은 것. 자신의 공간을 가꾸고 유지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종류의 이야기 같다. 매일 '일기 쓰고 앉아 있는' 작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손쉽게 쌓아지는 결과물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사사로워 보이거나 시시해 보이는 것에도 '계속'이나 '매일' 같은 단어를 붙일 줄 아는 사람들의 기록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무엇에 가까워진다. 자신만의 것을 쌓는다는 건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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