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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머문 이야기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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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잘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우리 자신을 잘 믿지 못한다. 그래서 목소리를 너무 크게 낸다고, 자존심이 너무 세다고, 혹은 야심이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자책한다. 샤마는 그 시에서 자기 가족의 자존심을 이카로스에 비유한다. "보라, 우리가 하늘에 너무 가깝게 솟아올랐다가 어떻게 추락했는지. 추락이 우리를 끝장내지 못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았을까. 여기 떨어지고, 저기 떨어지고, 비명을 지르며. 오 허세부리디지, 너희 생각만큼 나쁠 리는 없으니.""(47쪽)
 
"이코노미석으로 비행하며 고생해본 사람은 누구나 다오의 상황에 공감했다. 언론은 다오를 "승객", "의사", "사람"으로 지칭했으며, 애초에 그의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쟁점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취급됐다. 이 드문 사례에서 어쩌면 아시아인이 드디어 미국 중산층 전체를 대표하는 일반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회의적이었다. 일반인이 전부 이런 식으로 험악한 대접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다오는 '일반인'(everyman)이 아니었다. 내가 다오를 보고 일반인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카고 공항경비대원들은 그를 일반인이 아니라 어떤 물건으로 생각했다. 저들은 다오를 수동적이고, 남자답지 않고, 믿을 수 없고, 의심스럽고, 이질적인 존재로 여겼다." (55쪽)
 
"나는 "다음은 아시아인이 백인이 될 차례"라는 소리를 들으면 "백인이 될"을 "사라질"로 교체한다. 다음은 아시아인이 사라질 차례다. 우리는 성취가 대단하고 법을 잘 지킨다는 평판을 듣다가 기억상실의 안개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권력자가 되지 못하고 그저 권력에 흡수될 것이고, 백인의 권력을 나눠 갖지 못하고 우리의 조상을 착취한 백인 이데올로기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인종 정체성은 쟁점에서 벗어나며, 괴롭힘을 당하거나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매번 발언을 방해받는 것도 인종 정체성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이 나라는 우긴다. 우리 인종은 심지어 이 나라와도 무관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론조사에서 흔히 "기타"로 분류되고 신고된 강간, 직장 내 차별, 가정폭력 사건의 인종별 집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사회적 신호를 박탈당해 나의 행동을 타인과의 관계에 비추어 가늠할 수단이 없으니 유령 취급을 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행동하면 좋았을지, 무슨 말을 하면 좋았을지 내 생각을 샅샅이 점검한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듣는 것을 신뢰하지 못한다. 자아는 자유 낙하하는데 초자아는 무한대로 커져서, 나라는 존재는 부족하다고, 결코 충분히 못하다고 다그친다. 그러므로 더 잘하고, 더 잘되려고 강박적으로 노력하며, 자기 이익이라는 이 나라의 복음성가를 맹목적으로 따라 부르고, 내 순가치를 늘려 내 개인적 가치를 입증해 보이는 짓을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한다." (57쪽)
 
"그 시절 나는 심하게 외로웠고 별로 활기도 없었다. 나는 미술을 할 때, 나중에는 시를 짓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생기를 되찾았고, 그 속에서 자유를 발견했다. 왜냐하면 내 육체가 비물질화되고, 내 정체성이 떨구어지고, 내가 다른 삶을 사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모든 글이 이 자유를 인증했다. 존 키츠에 따르면 시인은 "정체성이 없다 - 시인은 끊임없이 어떤 다른 사람을 대신하고 그 사람의 역할을 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문학은 모든 주체가 피해 가는 그 중립자, 그 합성물, 그 모호성이며, 글을 쓰는 사람의 정체성을 비롯하여 모든 정체성이 실종되는 덫이다". (67쪽)
 
"나는 개인이 겪는 인종 트라우마에 관해 쓰는 일이 늘 불편했다. 인종 트라우마를 틀 짓는 뻔한 형식이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고백적 서정시의 형식은 내 인생이 그렇게 비범하지 않은데 나의 아픔만 특별하고, 이례적이고, 극적인 느낌이 들어서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서술법으로 소설을 쓰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생각을 어떤 인류학적 경험의 틀로 사출성형하듯 가공하여, 독자가 내 소설을 읽고서 한국인의 삶은 너무 가슴 아프군! 하고 여기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72쪽)
 
"물론 유색인종 작가는 인종적 트라우마를 이야기해야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너무나 오랫동안 백인이 상상하는 대로 구성되어왔다. 출판업계는 작가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를 기대한다. 즉 등장인물이 특이한 가족 관계나 역사적 비극에 의해 시험에 들었다가 결국 자기 긍정이라는 계시에 도달하는 이야기를 기대한다. 아시아계 미국인 작가들의 소설을 보면 작가가 트라우마의 배경을 머나먼 고국 땅이나 고립된 아시아계 가족 내부로 설정하여, 그들의 아픔이 미국의 제국주의 지정학이나 미국 내 인종주의에 대한 새삼스러운 증거가 아님을 확실히 해두는 작품이 많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외부적 요인은 - 가부장적인 아시아인 아버지, 과거 시대의 백인들 - 독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도록 충분히 멀찌감치 설정한다." (77쪽)
 
"프라이어는 내가 소수적 감정(minor feelings)으로 칭하는 것을 채널링하는 사람이었다. 소수적 감정은 일상에서 겪는 인종적 체험의 앙금이 쌓이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끊임없이 의심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자극받아 생긴 부정적이고, 불쾌하고, 따라서 보기에도 안 좋은 일련의 인종화된 감정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어떤 모욕을 듣고 그게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뻔히 알겠는데도 그건 전부 너의 망상일 뿐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소수적 감정이 발동한다. 클로디아 랭킨의 시집 『시민』은 소수적 감정을 탐구하는 책으로는 이제 고전으로 꼽힌다. 화자는 인종차별적 언사를 듣고서 자문한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지? 본 것, 들은 것이 다 확실한데도, 내 현실을 남에게 폄하당하는 경험을 너무 여러 차례 겪다 보니 화자 스스로 자기 감각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의 감각 훼손이 피해망상, 수치심, 짜증, 우울이라는 소수적 감정을 초래한다." (84쪽)
 
"인종에 관한 글쓰기는 이제까지 우리를 지워버린 백인 자본주의 인프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점에서 격렬한 비판을 담지만, 우리의 내면이 모순들로 뒤엉켜 있다는 점에서 서정시이기도 하다. 나는 손쉬운 극복의 서사에는 저항하지만 우리가 인종 불평등을 극복할 거라는 신념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민자가 고생하는 감상적인 이야기들은 짜증스럽지만 한국인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심하게 트라우마를 겪은 민족에 속한다. 내 안에 깃든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고정 관념을 넘어서려고 시도하다 보면 내가 어떻게(how) 인식되는지가 내가 누구인지(who)에 내재한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인종에 관해 진실한 글을 쓰기 위해, 나는 거의 서사를 거슬러 글을 써야 한다. 인종화된 마음은 프란츠 파농이 말한 대로 "지옥 같은 악순환"(infernal circle)이기 때문이다. (95쪽)
 
"어린 날의 순수가 보호받고 위안받을 때의 정신 상태라면, 어린 날의 불안은 그 사람이 최소한으로만 보호받고 위안받는다고 느낄 때의 정신 상태다." (113쪽)
 
"가족이 과테말라에서 왔건, 아프가니스탄에서 왔건, 한국에서 왔건, 1965년 이후의 이민자들이 공유하는 역사는 미국을 넘어 각자의 출신국으로 확장된다. 그곳에서 우리의 동족들은 서구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미국이 세우거나 지원한 독재 정권에 의한 대량 살상을 겪었다. 미국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애쓰느라고 우리는 인생에서 제2의 기회를 선사받은 양 황송해한다. 그러나 이민자들이 공유하는 뿌리는 이 나라가 우리에게 부여한 기회가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의 자본주의적 확장이 우리의 조국의 피를 빨아 부를 챙긴 방식이다. 우리가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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