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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적끄적

연말의 우리들, 박준의 시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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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다시 내리고

나는 쌀을 씻으려

며칠 만에 집의 불을 켭니다


섣달이면 기흥에서

영아가 올라온다고 했습니다

모처럼 얻는 휴가를

서울에서 보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난달에는 잔업이 많았고

지지난달에는 함께 일하다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르느라

서울 구경도 오랜만일 것입니다


쌀은 평소보다 조금만 씻습니다


묵은해의 끝, 지금 내리는 이 눈도

머지않아 낡음을 내보이겠지만

영아가 오면 뜨거운 밥을

새로 지어 먹일 것입니다


언 손이 녹기도 전에

문득 서럽거나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전에


우리는 밥에 숨을 불어가며

세상모르고 먹을 것입니다


(박준, '좋은 세상',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에서)



*

계절이라면 몰라도 날짜나 요일에 대해서라면 비교적 둔감하려 노력하는 편인 나 같은 사람도 '연말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시간과 장소. 굳이 예약을 하지 않았어도 괜찮을 만큼 적당히 한산한 일요일 저녁과, 몇 군데의 혼잡한 유명 카페들을 지나다 찾은 소박한 공간에서의 커피. 어쩌다 모임에 오지 못하는 달이 있어도 어딘가 함께인 듯이 느끼게 해주는, 무비톡클럽의 원년 멤버들. 우리가 5년 10년 함께이진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단지 오늘과 같은 소박한 하루들이 있었다는 것 정도면 되겠지요. 오늘의 이야기에서 영화 이야기의 지분은 사분지일도 되지 않았지만, 음식 얘기와 여행 얘기와 병원 얘기들, 그리고 처음 알게 되었을 때와 많이 달라진 근황들과 그렇지 않은 이야기들. 내년에도 우리는 몇 편의 영화를 더 같이 볼 수도 있겠습니다. (201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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