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사람 만나'라는 말에는 '자신보다'라는 단서를 붙인다 한들 스스로가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단서가 섞여 있겠다 생각하는 쪽이다.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말은 곧 내가 당신에게 정확히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얘기. 그래서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고맙다고 했고, 잘 가라고 했고, 손을 흔들었다. 커피 얼룩이 묻은 채 거의 빈 머그, "잠시 후 도착 버스는..." 안내가 쉴 틈 없이 들리던 버스 정류장, 버스가 완전히 정차하기 전에 그 버스에 다가서던 사람들, 그리고 당신까지. 어떤 기억은 생생한 풍경으로 남아서 소환되곤 한다. 추위를 많이 타니까, 아프지 말라고 했고, 당신의 말은 "치,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하다니. 나쁘다." 같은 것이었다. 웃어보였던가. 그날은 웃는 날이었다. 더 이상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가 담겨 있는 순간이 다시없을 것이라고 단호히 믿는 사람들처럼, 나는 문이 닫히고 정류장을 빠져나가 멀어져 가는 버스를 그 자리에서 몇 분간 더 바라봤다. 더 이상 소실점 같은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그러고 나서 얼마의 기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노트에 무엇인가를 계속 썼다. 어떤 날은 "나를 실어 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박소란, '노래는 아무것도') 같은 심술 섞인 독백이었고, 어떤 날은 당신은 잘 지내고 있나요, 같은 물음이었고, 또 어떤 날은 우리가 이제 우리가 아니라는 명제가 얼마만큼의 사실인지에 대한 고찰 같은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었겠지만 지나고 보면 결국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될 거야, 라고 겨우 눌러써볼 수 있을 법한.
"사실 후회할지도 몰라요."라고 했던 당신의 말이 내게는 아주 희미한 단서 같은 것이었다. 생의 일정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여진을 온몸으로 견디면서 나는 당신을 기다린 게 아니라 내가 괜찮아지기를 기다렸다. 괜찮아요. 가을이 가듯이 당신도 그렇게 아주 가세요, 라고 적어보듯이. 한때는 어떻게 하여 당신이 나의 삶에 들어왔는지에 대한 과정을 써 내려가던 그 노트를, 어느 날 보여주었던 적이 있다. 나중에 "거기 밑에다 덧글 달아둘 걸 그랬다"고 하던 그 말을, 내가 보고 있는 걸 의식했는지 그 작은 노트 속으로 얼굴을 숨기던, 그 모습을, 떠올라지지 않을 때까지 떠올려 보며 노트 안으로 도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쓰는 펜 끝에다 마음을 여과 없이 적었다.
마지막으로 쓴 장문의 메시지를 나는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읽어달라고 청하는 건 나의 자격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상대의 마음더러 내가 어떻게 하라고 청유형으로라도 말하는 건 경우에 따라선 부담스러운 폭력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기에 '읽지 않아도 된다'는 건 분명한 진심이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인가 결정을 하는 것 자체에는 어렵사리 심사숙고할지언정, 어떤 마음을 먹은 이후에는 다시는 그걸 돌아보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 마지막 전하지 못한 말을 당신이 읽는다면 읽는 대로, 읽지 않는다면 읽지 않는 대로 확고한 뜻에 따른 것이겠기에 나는 더 이상 노트 바깥으로는 무엇이든 더 쓰지 않았다. 그 노트를 산 건 무더운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일이다. 노트에 글자들이 채워져 간 건 가을의 일이었고, 더 이상 노트가 펼쳐지지 않게 되기 시작한 건 겨울의 일이다. 매일 숫자를 세어가며 쓰이던 문장들은 차츰 빈도가 뜸해져 갔다. 처음에는 무엇이든 써야만 그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어느 날엔가는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괜찮은 경우가 있었다.
우리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나를 알아봐 준 상대에 대한 고마움을 내포한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서 그날은 애써 단 한 번도 '미안'이란 단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이었던 우리는 앞으로도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어제가 있었다는 걸 다만 받아들이면서, 오늘이 생에서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 매 순간 가늠하거나 흘려보면서, 어떤 식으로든 다가올 내일을 끌어안으면서. 이제 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을 생각하기보다 그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를 생각한다. 당신 역시 그럴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 가을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않을 것이다. (201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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