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초 개봉할 <신과함께-죄와 벌>의 속편 제목이 '인과 연'이라는 것을 무심히 보다가 나는 정말로 '인(因), 연(緣), 과(果)'를 다루는 영화로 애착을 갖고 있는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를 떠올렸다. 그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와 방식, 그리고 원작 모두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특히 각별한 영화인 이유는 '블로그'를 하기로 하고 나서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쓴 영화이기 때문이다. 5년 전의 일이다. 물론 지금 다시 읽으면 도대체 저런 글을 쓴 게 내가 맞나 싶을 만큼 미문들과 미숙한 접근들로 가득한데, 그래도 가끔 꺼내어 살펴보면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하나의 세상에 실눈을 뜨기 시작한 내가 거기 있다. 처음의 블로그 제목은 '지니의 영화 V:U'였다.
퇴사를 하고 나서 백수 생활이 예상했던 것보다 길어지고 있다. 무언가를 하고는 있지만 정말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 상태이고, 보기엔 바빠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다.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진짜로 하고 있지는 않다"는 '프란시스'(영화 <프란시스 하>)의 이야기를 이번 달 영화모임에서 다루기로 한 건 어쩌면 지금의 상태를 내 의식 어딘가에서 끄집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늦봄을 힘들게 지나 보내고 나서 또 불안정하고 불규칙한 여름 한가운데에 있다 보니 상황에 이유를 부여하거나 끼워 맞추는 경우도 생긴다. 블로그도 그것 중 하나에 해당한다. 플랫폼의 한계를 느끼면서 조금 더 열심일 수 있는 것(인스타그램, 브런치)에 집중해보겠노라고 블로그를 정리했다. 그러던 중 알음알음하여 블로그를 '팔았'다. 이것도 벌써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러고는 얼마간 잊고 지냈는데, (블로그를 완전히 잊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다른 네이버 계정으로 이웃추가를 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는 레이아웃 일부가 바뀐 걸 보았고, 마침내 오늘은 내가 쓰지 않은 다른 이의 글이 올라온 것을 확인했다. 이제는 완전히 떠나갔구나 하고 있었는데 몇몇의 연락들을 받았다. 내가 쓴 글 같지는 않은데 혹시 해킹 같은 거 당한 거 아니냐고. 짧은 말로 설명을 보탰다. 그렇게 됐다고.
짧지 않은 시간 쌓아온 흔적들을 돈 몇 푼에 정리한 건 잘한 게 아닐 거라고 자인하면서도, 평소에 블로그, 브런치, 인스타그램이며 빙글, 텀블러, 워드프레스, 티스토리, ... 물론 에버노트와 몇 가지 클라우드들까지 간접적으로나 조금씩이라도 여러 플랫폼에 내 흔적들을 줄곧 보관해왔다. 그러니 블로그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쓴 글이 사라지진 않는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난 분명, 한때 내 일부이자 전부였던 것들을 간단한 결정으로 없애버렸다. 카테고리 이름은 뭘로 할까 가늠하던, 글을 쓸 때 반말을 쓸까 존댓말을 쓸까 고민하던, 쓰고 나서 오타는 없나 사진은 적당히 잘 올라갔나 두근거리며 훑던, 첫 덧글이 달렸을 때, 이웃이 늘어날 때 설레하며 다른 사람들의 글을 기웃거리던 그 시간들을.
지금이 구름(Cloud) 속 지도(Atlas)일지, 지도 속의 구름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돈 많은 백수가 아니라 돈 없는 백수라는 걸 자조하면서. 평범한 저녁을 먹었다. 글을 쓸 때 가끔 지우고 다시 쓰곤 하는 것처럼, 이 시간도 고쳐 쓰일 수 있는 것이리라고 애써 생각해보면서. 여름이 지날 무렵에는, 이 계절이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워도 밤은 오고 아침도 태연한 척 온다. 이제 오늘은 17일이 됐으니, 그만 잠을 자야겠다.
(201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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