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지구인들의 마지막 희망 일랜시아로의 여행 (...) 마의 근원인 마족들과의 전쟁, 폐허 속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700년 전 일랜시아를 건설한 고도의 지적 생명체 가이아의 모체인 神프로토타입의 전언을 가슴에 품고 머나먼 저 편 희망의 미래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일랜시아로의 여행은 시작됩니다."
1999년 출시된 넥슨의 온라인게임 '일랜시아'의 홈페이지에는 위와 같이 게임 소개 글이 적혀 있다. 여행. 모험. 여정. 세계. 이런 키워드들이 주는 감정은 대체로 호기심과 설렘에 해당한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미지의 공간에서 내 분신 같은 캐릭터와 함께하는 시간들은 마치 미숙한 채로 태어나 세상의 여러 위협과 환경 변화 속에서 살아남는 성장의 과정과도 같다. 예컨대 NPC가 하는 말 한마디를 유심히 살피고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단서를 찾고 때로는 너무 강한 상대를 만나 벽에 부딪히는 일들.
삶을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처럼 게임도 영원히 할 순 없다. 게임이 '망해'서 서버가 문을 닫지 않아도 학업이나 취업 등과 같은 사용자 본인이 처한 상황 변화로 게임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일도 잦다. 물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유 시간을 어렵사리 마련해볼 수는 있겠지만, 유년 혹은 청소년기에 걱정 없이 빠져 있던 그 경험은 다시는 반복될 수 없다. PC게임보다 모바일 게임 위주로 판도가 재편되고 긴 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 게임보다 순간의 재미와 몰입감을 중시하는 캐주얼 한 게임들이 주류를 이루는 건 단지 스마트폰으로의 중심 이동만이 원인이 된 현상은 아닐 것이다. 놀 시간이 줄어들고 이동하는 시간이 많아진 사람들의, 그러나 게임을 하고 싶은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어떤 게임에서는 '자동사냥'과 같은 기능을 아예 적극 지원하기도 한다.
요즘의 게임 이용 양상은 다소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게임들.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게임들은 하나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불편하게, 헤매면서, 시행착오와 실패로 가득한 가운데 시작하고 겪었다. 온라인게임의 경우라면 그러던 중 게임 안에서 만난 다른 사용자들과 공동의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교류가 쌓이게 되었던 것이고. 16년 차 '일랜시아' 유저이기도 한 박윤진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2019)는 일랜시아라는 게임을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관객이라 해도 각자가 좋아하고 몰입했던 애정의 대상과 존재들을 하나씩 떠올리게 만든다.
(...)
https://brunch.co.kr/@cosmos-j/1078
'극장 밖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테넷'과 루이스의 '헵타포드'를 겹쳐 생각하며: 다시 본 영화 '테넷'(2020) 리뷰 (0) | 2020.09.08 |
---|---|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 영화 '테넷'(2020)에 관하여 (0) | 2020.08.23 |
리처드 링클레이터, '에브리바디 원츠 썸!!'(2016) (0) | 2020.07.21 |
세 여성이 발화하는 하나의 스캔들: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2019) (0) | 2020.07.21 |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중요한 장면 (0) | 2020.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