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따금 '헵타포드 B가 진정한 우위를 점하면서 일별의 순간이 올 때, 나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경험한다. 나의 의식은 시간 밖에서 타다 남은 반세기 길이의 잿불이 된다. 이런 경험을 할 때 나는 세월 전체를 동시에 지각한다. 이것은 나의 남은 생애와 너의 모든 생애를 포함하는 기간이다."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당신 인생의 이야기』, 김상훈 옮김, 앨리, 2016, 217쪽.)
억 달러 단위의 예산이 들어가는 영화가 '오리지널 스토리'일 수 있는 것, 스튜디오와 긴밀하게 협업하는 필름메이커가 거의 전권을 쥐고 자신의 구상과 계획을 물리적 실체로 만들 수 있는 것. '테넷' 같은 경우가 아니고서는 이런 일을 떠올리기 어렵다.
여러 필자들이 일찍이 말하거나 썼듯이 나 또한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만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거나 어려워야만 하는 것에 더 가깝고, '한마디로 간단하게 말해서' 같은 건 대부분 경계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이 세 번째 극장 관람이자 두 번째 아이맥스 관람이었던 <테넷>(2020) 역시 같은 맥락으로 다가왔다. 재관람을 반복한 건 머릿속에서 시간선을 완벽히 이해하려 하거나 컷과 신, 시퀀스 단위로 분석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의 조각들이 '지금, 여기'에 내내 가져다주는 현재라는 테마를 조금 더 오래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역설'이 '역설'이기 때문에 그 정답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듯이,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건 아니듯이.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1998)와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2016)의 잔영을 진하게 떠올렸다. "모든 여정을 알면서, 그 끝을 알면서도, 난 모든 걸 받아들여."라고 말했던 루이스. 비선형적 시간관을 알고 난 뒤 예정된 현재를 끌어안고 그것이 최소화인지 최대화인지를 알기 위해, 앎을 경험으로 실현하기 위해 거기 한 번 더 뛰어들었던 루이스.
앞서 끼적였던 글에서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다"라는 <테넷>의 인용에 대해 쓴 것과 테드 창/드니 빌뇌브 작품에서의 시간관은 비슷하게 다가온다. 앞에 다가온 거대한 운명에게 속절없이 눈 감고 무릎 꿇는 게 아니라, 믿고 있는 어떤 가능성이 단지 가능한 게 아니라 실제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기꺼이 생을 건 사람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주도자/주인공(Protagonist)가 되고자 했던 사람들.
그래서 '닐'(로버트 패틴슨)은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라는 말이 운명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했다. 약간 바꿔서, '현재'.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살아있는 것, 살아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는 것밖에는 없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방향과 역방향의 존재들의 액션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다만 거기에 시간이 겹쳐 있고, 현재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목격할 따름이다." (송경원, 「나는 목격한다, 영화가 창조한 '현재'를」에서, 『씨네21』 No.1271, 63쪽)
<테넷>은 애초부터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할 생각 같은 건 없는 영화였다. 어차피 일어나고야 말 것인 어떤 현재를 두고서 그것을 최선을 다해 있는 힘껏 시청각화 하였을 따름이겠다. 내게는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는 말이 과정에 있을 수 있는 구멍에 대한 면피가 아니라 시간이 앎의 영역이 아니라 느낌의 영역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그러니 내가 만난 <테넷>은 루이스가 만난 '헵타포드'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이고,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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