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라기보다는 생각나는 대로의 끼적임)
결국 한없이 높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시네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속절없이 앉아 1초에 24 프레임의 죽음을 바라보는 일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보면서 캐릭터 자체보다는 그들이 속해 있는 서사와 그것이 만들어지는 구조 자체가 더 인상적이라고 생각한 경우가 많았다. 언제나 비선형적 서사가 추구해볼 수 있는 극한의 구조적 복잡성이나 서술 트릭을 통해 어떤 효과를 만들어냈는데, <테넷>(2020)도 그런 면에서는 마찬가지다. 인류의 생존이 시간과 공간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 달려 있는 세상에서, 일어날 일이 예정대로 일어나는 것 같지만 인물들은 그것에 대해 한 번 더 물어보고 한 번 더 생각하면서 달려 나간다. 그리고 위험을 무릅쓴다.
150분의 상영시간 안에 잦은 컷 편집과, 발화와 보여주기를 통한 중요 개념 설명이 담겨 있다. 선형적 시간관으로 말하자면 어느 것이 정방향이고 어느 것이 역방향인지를 생각하는 데에 일부나마 관람의 에너지를 써야 하기도 했지만, 전작들이 그랬던 것처럼 개념 하나하나를 낱낱이, 그리고 샅샅이 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Don't try to understand it, feel it."이라고 과학자가 주인공에게 말하는 대목은 그 자체로 관객에게 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결국 일어나는 일의 순서대로 촬영되지 않은 이야기를 관객이 그렇게 느끼도록 여러 영화 언어와 기법을 통해 가공하는 것인 것처럼, 이 이야기도 실제 물리학적 법칙들을 엄정하게 대입해야만 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이동 등을 소재로 한 많은 영화가 그 설정 자체만으로 여러 패러독스를 생각하게 하듯)
내게는 <테넷>을 보면서 가장 많이 겹쳐 생각한 것이 <컨택트>(2016), 더 정확히는 그 원작인 테드 창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1998)였다. 나는, 우리는, 결국 시간에 매여 살고 인간의 이해 범주에 속해 있는 시간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목적론적 세계관과 비선형적 시간 인식을 언어학자와 물리학자의 시선에서 전면적으로 다룬 테드 창도 소설 밖에서는 결국 인과와 선형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인간이듯이, 크리스토퍼 놀란도 영화 밖에서는 마찬가지로, 단지 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세상을 만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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