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써서 보는 영화] 온라인 수업 중 내 영화 취향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영화 한 편만 고르는 것을 제일 못 하는 사람답게 <레디 플레이어 원>과 <쓰리 빌보드>와 <스타 이즈 본>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고 넓은 범주의 답을 대충 했었다. 이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한데, 상업 영화와 다양성 영화를 굳이 다른 범주로 두고 싶어하지 않고 자의적인 판단에서 '좋은 이야기'로 생각되는 작품이라면 그건 좋아하는 영화의 범주에 어김없이 넣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게 '좋은 영화란 이런 것이다'라고 기준을 설정하는 건 마치 세상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것들을 단 하나의 명제로 설명하려는 것과 같아서, 대전제처럼 좋은 영화의 기준을 정의하는 건 언제나 불충분하고 부정확하다. 그러니 내 이야기는 언제나 특수하고 국소적인 방식으로 시작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은 대중문화를 향한 순수한 애정이 쓸모없는 게 아니라고 다독여주는 감동적인 엔터테인먼트였다. <쓰리 빌보드>(2017)는 서로에게 상처 낸 이들이 자신의 마음에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다른 사람의 마음이 되어보는 이야기였다. <스타 이즈 본>(2018)은 이미 존재할 뿐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이어온 내용이라도 얼마든지 새로운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들려주는 영화였다. 셋 모두, 내게는 탁월하고 아름다운 걸작이다.
쓰고 보니 셋 다 2018년에 극장에서 본 영화다. 셋 다 '프리랜서인 척하는 백수'일 때 만난 영화들이다. 영화의 이야기가 관객에게 주는 생각과 감정은 그 관객이 어떤 상황에서 그 영화를 보는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 극장에서 만나는 이런 영화가 내게 너무도 필요하고 간절하다. 저 영화들을 극장에서 세 번, 네 번, 여덟 번씩 만났던 그때의 '나'들은 어디에 있을까. 아직 거기 머무르고 있을까.
이메일 연재 [1인분 영화]를 위해 <월드워Z>(2013)를 두 번 다시 보았고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Muse의 'Follow Me'를 들으며 괜한 마음으로 지난 시절을 중얼거린다. 올해 만난 영화의 경험에도 분명 내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순간들이 많은데, 분명히 해소되지 않는 갈증 같은 것이 있다.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순간을, <쓰리 빌보드> 같은 순간을, <스타 이즈 본> 같은 순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조금 울적해진 기분으로 블루레이들 중 몇 개를 꺼냈다. 몇 마디의 말들이 아른거린다. "고맙구나, 내 게임을 해줘서."(<레디 플레이어 원>), "가면서 결정하자고."(<쓰리 빌보드>),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어 다행이야."(<스타 이즈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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