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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매의 여름밤>(2019)을 보고 난 후의 감상을 어떻게 정리할지 궁리해보는 중이다.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영화를 보는 동안 박준의 위 시를 떠올렸던 계기부터 써볼까. 여느 시들의 인용이 대체로 그러하겠지만 이 '처서'라는 시도 그 내용 자체보다는 담겨 있는 분위기에 착안했다. 마루에 앉아 저기 널려 있는 옷들을 바라보며 '아 여름이구나' 하고 중얼거려보는 일. 아니면 그 여름에 불던 바람이 따뜻한 바람이었는지 찬 바람이었는지, 습도는 어땠는지 같은 기억들.
여름이라는 계절을 기억하게 하는 요소에는 이런 것들이 있겠다. 내 경우로 한정하자면 그 계절의 한가운데보다는 다음 계절로 넘어갈 무렵, 그러니까 절기로 따지자면 입추보다는 처서가 더 알맞을 것이다. <남매의 여름밤>은 내게 백로의 무렵에 만난 처서의 영화 같았다.
영화의 시작은 떠나기 전의 아쉬움을 안은 채 머물던 방을 바라보는 '옥주'(최정운)의 모습, 그리고 나가자며 재촉하는 아빠 '병기'(양흥주)의 목소리, 그리고 이어서 어디론가 떠나는 다마스 차량 안이다. 차창 밖의 시점에서 각각 조수석과 운전석에 앉은 '옥주'와 '병기'를 <남매의 여름밤>은 잠시 지켜본다. (여기서 신중현이 작사/작곡한 '미련'의 영화 속 세 개의 버전 중 하나인, 임아영이 부른 곡이 한동안 흘러나온다.) 앞서 말한 '어딘가'는 '옥주'의 할아버지 댁이다. 이 가족은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할아버지 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아니, 적어도 '병기'는 그렇게 작정했다. '옥주'는 "할아버지한테 이야기는 한 거야?"라고 물어본다. 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한 후, 정확히는 여기서 잠시 지내도 되겠냐는 '병기'의 말에 콩국수를 먹던 할아버지 '영묵'(김상동)이 "그렇게 해라"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남매의 그 여름 이야기는 펼쳐진다.
어린 남매의 여름이기도 하고 어른 남매의 여름이기도 한 <남매의 여름밤> 이야기는 시나리오에 맞춘 로케이션으로서의 집이 아닌 집에 맞춘 시나리오를 통해 생생하게 관객들 저마다 지니고 있을 하나의 어떤 여름을 꺼내놓는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래된 가구들과 이층 집의 계단 가운데에서 '옥주'에게 작은 사적 공간을 허락해주는 미닫이 문, 아직 잘 돌아가는 재봉틀과 남향이어서 볕이 잘 드는 창문, 텃밭이 있어 고추나 포도 같은 것을 가족에게 허락해주는 마당. 낡은 자전거와 모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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