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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밖에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그리고 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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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츠네오는 뭔가를 깨달았다. 조제가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니라 하나의 바람이며 꿈이라는 것을. 그것은 현실과는 다른 차원으로 엄연히 조제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것임을."

-다나베 세이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에서 (양억관 옮김, 작가정신, 2017)

그때는, '좋은 이별'이라는 게 있을까에 관해 생각했었다. 그런 게 있다면 '나쁜 이별'도 마땅히 있는 것일 텐데 이에 대한 판단과 감회는 자신이 볼 수 없는 삶의 마지막 뒷모습을 남길 때까지도 내내 재정의되고 새로이 기억될 테니 좋고 나쁨 자체가 관건은 아니겠다. 다만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와 그로부터 떠나가고 다가오는 것들이 겹겹이 교차하는 그 다음이 더 중요해지는 것이겠지.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시간들 속에서 그 세부와 풍경을 다시금 응시하는 일이, 지금 여기에 선 스스로에게 어떤 차원의 다독임을 만들어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래서 <조제>(2020)를 보고 나서 찬바람 속을 걸으며 지난 기록들을 꺼내보기로 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을 한 영화 모임에서 다루고 해설했던 그날밤 가만히 남겨둔 기록이 있다. 그것을 다시 불러두고 싶다. 그러고 나서 한 번 더 그것에 관해 생각하겠다. (2020.12.15.)

"(...) 그러나, 내가 넘어진 자리가 여기라는 바를 아는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막연한 환상에 기대지 않은 채 나에게 '다음'이 분명 없지 않을 것임을 믿는 한, 나는 앞으로도 넘어진 곳에서 다시 몸을 일으킬 것이다, 비록 상처투성이라 할지라도.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당신 역시, 넘어져 있다면 꼭 다시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한다. 우리가 넘어진 자리는 아픈 곳이지만, 우리가 일어설 때 그곳은 '아픔이 있었던 곳'이 될 테니까. 다리 대신에라도 손이 움직일 수 있으니까. 이렇게 말해도 될까. 좋은 이별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주저앉아 있던 순간에도 내 눈물을 닦은 게 내 손이었다는 걸 잊지 않게 되는 순간 찾아오지 않을까. (2018.06.23.)

아픔이 있었던 곳에서, 다리 대신 손이라도 움직여서, 다시 사람은 일어난다. 그 손으로 눈물을 닦고, 그 손으로 넘어진 자리를 딛고. <조제>(2020)를 보고 나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 생각을 하다가 그것에 관해 2004년에 이동진 평론가님이 쓴 평문을 생각하다가 평론가님이 다른 책에서 쓴 또 다른 말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한계선 근처에서 스스로의 연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끝끝내 버텨내려 할 때, 비로소 인간은 숭고해질 수 있습니다. 먼 훗날의 결정적 패배가 예감된다고 해도."

-이동진, 『밤은 책이다』에서(위즈덤하우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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