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충분히 침전시켜 결론을 품고 쓰기 시작한 기억은 거의 없다. 내게 해석은 묘사의 길을 걷다 보면 종종 예기치 못하게 마주치는 전망 좋은 언덕과 같았다. 묘사하는 마음이란, 그런 요행에 대한 기대와 ‘아님 말고. 이걸로도 족해’ 하는 태평스러운 태도를 포함한다. 묘사는 미수에 그칠 수밖에 없지만, 제법 낙천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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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확실한 것은, 빼어난 전문 스턴트맨이 즐비하고 뭐든 디지털 기술로 그려낼 수 있는 시대에 톰 크루즈는 배우가 직접 감행하는 액션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차이와 그것이 객석에 가져다주는 쾌감의 차이를 믿고 실천한다는 점이다. <폴아웃>에는 왜 좀 더 간단한 방법으로 작전을 수행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에단 헌트가 “그렇지만 나는 더 나은 방법으로 하고 싶다”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자못 자기 반영적이다.”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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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아웃> 도입부의 에단 헌트가 읽고 있는 책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다. 그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길 위에서 영원처럼 긴 모험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중년이다.”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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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본래 실망스럽지만, 청산할 수 있는 부채가 아니다. 마침내 동부로 날아간 레이디 버드는 미움으로 말미암은 열렬한 관심이 사랑과 멀리 있지 않으며 그것이야말로 앞으로 자기가 살아갈 저력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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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영화 관람은 한시적으로 이성의 스위치를 끄고 스펙터클에 몸을 맡기는 다소 자존심 상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지만, 산만함이 만연한 세상에서 상황은 역전된다. 어떤 부류의 영화를 보건, 영화관은 적어도 우리의 뇌에서 정보망의 단자를 뽑고 검색과 스캔을 일시중지하도록 강제한다. 그리하여 노이즈에서 해방시키고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인간 본연의 능력을 회복시킨다.”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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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거꾸로 사고해야 할지도 모른다. 프레임 안에 시간의 궤적을 엄격하게 그려가는 영화를 견디기 버겁다면, 내면의 시계에 어떤 결락이나 고장이 발생한 게 아닐까 의심할 수 있는 것이다.”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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