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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밤의 끝을 알리는> 한 페이지 or 한 챕터 필사해보기
"나의 사랑스러운 벗에게. 우리를 떠올리면 내 마음이 덥다. 나의 지난날과 오늘 당신의 고독이 마치 거울처럼 닮아 있는 듯해 더욱 애달프고 섧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도 있다. 길을 잃었다 생각했을 때조차 사실은 길 위에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충분한 만큼 울어도 좋다. 눈물을 가두고 모은들 바다라도 되겠는가? 필요한 만큼 아파해도 좋다. 우리는 부러진 다리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통증을 느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억지로 일어서기가 아니라 치료와 회복인 것이다. 그리고 당부컨대 너무 오랫동안 두려워하지는 마시라. 길은 걸음 뒤에 자연히 나는 발자취일 뿐, 우리가 긍긍(兢兢)하며 찾아 나서야 할 보물도, 어쩌면 그 무엇도 아니다. 자연스러운 보조(步調)로 살며 정원을 가꾸듯 생에 시간을 들이시라. 작은 씨가 움트는 데도 시간이 필요한데 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시라.
우리는 나사도 부품도 아니고 살아서 꿈을 꾸는 존재이다. 사회가 이어 붙인 통념 혹은 그 부스러기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들이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결코 잊지 마시라. 자신을 안다는 것 자체가 곧 대체될 수 없는 자존감이며 길 잃지 않게 하는 무수한 표지 중에 하나임을, 배우는 대신 이제 깨달으시라. 내다보는 대신 들여다보시라. 자기 안의 자신에게 먼저 묻고 또 물으시라.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세상을 무시하시라. 당신이 거기 있을 때 비로소 당신의 세상도 있는 것이다.
사위(四圍)가 전부 진창이라면 머무르고 싶은 곳에 이를 때까지 걸맞은 속도로 겸허히 가시라. 다리가 아파 멈춰 쉬는 것을 아까워 마시라. 부끄러워하지 마시라. 자신에게 말을 걸며 그저 묵묵히 가시라. 어느 순간 주변이 고요해지고 세상의 넋두리들도 사라지면, 비로소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 소리가 끊이지 않는 긴 돌림노래처럼 귓가에 머무르며 계속 들려오게 하시라."
-심규선, 「소로」, 『밤의 끝을 알리는』, 큐리어스, 2022, 134-135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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