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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미래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기억하기: '컨택트'(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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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정을 알면서, 그 끝을 알면서도, 난 모든 걸 받아들여. 그 모든 순간을 기쁘게 맞이하지."
-‘루이스’의 내레이션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를 들을 때면 영화 <컨택트>(Arrival, 2016)의 첫 번째 신과 마지막 신이 지금도 생생하게 스친다. 사람은 자신의 앞에 벌어질 일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알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특정한 언행이나 사건을 되돌리기를 원하는 것도 그 일이 장차 미래에 어떤 영향을 가져오는지를 사후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삶은 그러니까 오직 지금만 알 뿐 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언어학자인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는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열두 척의 ‘셸’ 중 몬타나 주에 있는 한 곳의 내부에 들어가 ‘외계인’들이 지구에 왜 찾아왔는지를 알아내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 이론물리학자인 ‘이안’(제레미 레너)과 함께다. 고요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 ‘루이스’는 ‘외계인’들을 없애야 할 적이 아니라 대화 상대로서 접근하고, 이전까지의 군과 과학자들이 보지 못했던 원형의 문자를 그들로부터 발견한다. 또한 ‘이안’과 함께 그들을 ‘에봇’과 ‘코스텔로’라 이름 붙이기도 한다.
 
영화 <컨택트>를 지배하는 화두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시간을 과거에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선형적으로 경험하는 인간이 만약 선형적 구분이 없는 비선형적인 방법론으로 시간을 인식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가정이다. 여기에는 특정한 사건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의 인과론적 인식과 목적론적 인식이라는 양대의 선택 혹은 물음이 동반된다. 시점의 구분 없이 시간을 통시적으로 인식하게 되면 어떤 하나의 일과 다른 일 사이의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삶’ 혹은 ‘우주’라는 거시적인 관점 하에 그것들이 어떤 역할 혹은 의미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 목적론적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루이스’와 ‘이안’이 만나는 ‘외계인’들은 시간을 그렇게 인식하는 이들이다.
 
다른 하나는 언어가 그 언어가 속한 문화권의 사고의 틀을 결정한다는 언어 결정론이다. 물론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두 문화권 사이에 유사한 문화적 양식이나 경향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들어서 언어 결정론적 시각은 반박되거나 비판받기도 한다. <컨택트>가 언어 결정론에 기반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에봇’과 ‘코스텔로’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문자가 원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원형으로 된 그들의 문자는 소리와 무관한 표의문자이며 특정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언어적 요소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가 아니라 원형 자체로 표현된다. 이들의 언어를 유심히 지켜보면 국내 개봉용 제목인 ‘컨택트’는 인간과 외계인의 소통에 무게를 둔 나름의 작명으로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의지란 의식의 본질적인 일부인 것이다. 아니, 정말로 그런 것일까? 미래를 아는 경험이 사람을 바꿔놓는다면? 이런 경험이 일종의 절박감을, 자기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면?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당신 인생의 이야기』, 김상훈 옮김, 엘리, 2016, 210쪽.
 
영화 <컨택트>의 원작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테드 창의 원작과 드니 빌뇌브의 영화가 공유하는 전제는 앞서 언급한 ‘비선형적 시간 인식’을 기반으로 ‘인간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게 된다면 과연 그것을 바꾸려고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맨 앞에 소개한 ‘루이스’의 내레이션은 이 물음에 대한 그의 답처럼 다가온다. 인생 전체를 한 권의 책으로 압축할 수만 있다면 비선형적 시간의 경험은 책의 뒷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도 거기 무엇이 적혀 있는지를 안다는 것일 텐데, 이건 단지 부러운 능력이기만 할까? 테드 창의 신작 소설집 『숨』이 국내 출간된 것을 나름대로 기념해 영화 <컨택트>를 다시 보고 원작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결론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과정을 여기 남겨두려 한다. 우리가 현재에 충실하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막연히 두려워만 하지는 않으면서 자신의 의지로 내릴 수 있는 매 순간의 선택들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오직 오늘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내일을 볼 수 있다면 오히려 오늘을 경시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2019.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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