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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병력은 개인에 대해 그리고 그 개인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병력은 질병에 걸렸지만 그것을 이기려고 싸우는 당사자 그리고 그가 그 과정에서 겪는 경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전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병력' 속에는 주체가 없다. 오늘날의 임상 보고에는 주체가 '삼염색체백색증에 걸린 21세 여성'과 같은 피상적인 문구 안에 넌지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이런 식의 병력은 인간이 아니라 쥐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고 기록한 병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주체 즉 고뇌하고 고통받고 병과 맞서싸우는 주체를 중심에 놓기 위해서는 병력을 한 단계 더 파고들어 하나의 서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이?'뿐만 아니라 '누가?'를 알게 된다. 병과 씨름하고 의사와 마주하는 살아 있는 인간, 현실적인 환자 개인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10쪽)
"당시 내가 흥미를 품었던 분야는 지금까지 말한 '결손'보다는 오히려 '자기' 그 자체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신경장애였다. 이러한 장애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것이고 또한 기능의 결손이 아니라 기능의 과잉이 원인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일단 구분해서 별도로 생각하는 방법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먼저 이것만은 못 박아두고 싶다. 즉 병이란 결코 상실이나 과잉만이 아니다. 병에 걸린 생명체, 다시 말해서 개인은 항상 반발하고 다시 일어서고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하고 주체성을 지키려고 한다. 혹은 잃어버린 주체성을 되찾으려고 하고 아주 기묘한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반드시 반응한다. 이러한 수단을 조절하거나 유도하는 것은, 분명히 신경 조직에 대해서는 과도한 요구일 수도 있겠지만, 의사인 우리들의 기본적인 의무이다. 아이비 맥킨지는 이 점을 당당하게 서술했다.
도대체 '병의 본질'이라든가 '새로운 병'이란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의사는 자연학자와는 달리 다양한 생명체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을 이론화하는 것보다, 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다." (24쪽)
"저로서는 어디가 잘못된 건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좋은 점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훌륭한 음악가이고 음악은 선생님의 삶 그 자체입니다. 만약 제가 처방을 내린다면, 음악 속에 파묻혀서 생활하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음악이 선생님 생활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지내시라고 말입니다." (42쪽)
"그러나 철학적인(예를 들면 칸트적인) 의미에서나 혹은 경험론적·진화론적인 의미에서 볼 때 판단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동물의 경우 아니 인간의 경우라도 '추상적 경향' 없이 살수는 있지만, 판단 능력이 없다면 당장 사멸하고 말 것이다. 판단은 고등한 생활이나 정신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능임에도, 고전적인(계량적인) 신경학에서는 무시되거나 잘못 해석되어왔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생긴 원인은 신경학 그 자체가 상정하고 있는 가정들 즉 신경학의 진화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전적인 신경학은 고전 물리학이 그랬던 것처럼 항상 기계적인 성격을 띠어왔다. 뇌를 기계에 비유한 잭슨부터 컴퓨터에 비유하는 오늘날의 신경학자들에 이르기까지." (45쪽)
"노트에는 사실과 감상이 하나로 얽힌 여러 문장들이 뒤범벅되었다. 긴 문장이 있는가 하면 조목조목 적어놓은 요점만 있기도 했다. 그에게서 보이는 문제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순간순간마다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가엾은 남자가 누구이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지 등의 문제를 여러모로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이처럼 기억이 끊겨서 연속성을 잃어버린 존재를 과연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나는 이때도 그리고 나중에 노트에 적은 내용 속에서도 이 '잃어버린 영혼'(이 말은 과학적인 용어는 아니지만)에 대해서 생각을 거듭했다. 어떻게 하면 연속성을 그에게 돌려줄 수 있을까? 그는 뿌리가 없는 인간이었다. 아니 먼 과거의 일에서만 뿌리가 남은 사람이었다.
'연결', 하지만 그가 어떻게 뿌리를 연결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그가 뿌리를 연결하도록 도울 수 있단 말인가, 대관절 연속성이 없는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 흄은 이렇게 말했다.
감히 말하자면 우리는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차례차례 이어지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흘러간다." (62쪽)
"이 끝없는 망각, 이 가슴 아픈 자기 상실을 지미는 알았다고도 할 수 있고 몰랐다고도 할 수 있다(우리는 다리나 눈을 잃으면 다리가 없고 눈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그 사실 자체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을 깨달을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문제를 그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72쪽)
"지미를 알게 된 지도 벌써 9년이나 되었다. 신경심리학적으로 보면 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중증 코르사코프 증후군 환자이다. 그는 바로 몇 초 전에 일어난 일도 기억하지 못하며, 1945년 이후의 일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적인 혹은 정신적인 면에서 보면, 그는 때때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쉽게 흥분하고 지루해하거나 초조하고 불안해 어쩔 줄을 몰라하며 두서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아름다움과 영혼에 마음을 기울이는 인간, 즉 키에르케고르가 나눈 범주들인 예술적·윤리적·종교적·극적인 것 모두를 풍요롭게 누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77쪽)
"더러는 지능이 매우 낮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물쇠를 열지도 못하고, 하물며 뉴턴의 운동법칙을 이해하거나 세계를 개념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세계를 구체적인 것,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마틴이나 호세, 쌍둥이 형제처럼 재능이 풍부한 '바보'들이 가진 또 하나의 측면이다." (29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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