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영 중인 JTBC 드라마 [런 온](2020)을 넷플릭스에서 보고 있다.
1.
그런 분야/직무가 많겠지만 영화 마케팅, 수입, 배급 등의 업무는 '자신 빼고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는 특징이 있다. 나만 알 수 있는 엔딩 크레디트의 이름 한 줄. (물론 수입 외화에는 그것도 없다) 보도자료를 쓰든 포스터나 예고편을 만들든 여러 이벤트/프로모션을 하든 그건 영화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지 자기 이름으로 하는 일이 아니어서, 보람과 성취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
2.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자 다른 사람들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아직 앉아 있는 미주를 보고 머뭇거리며 다시 앉는 선겸, 엔딩 크레디트가 끝까지 올라가기를 기다려 '번역 오미주' 한 줄을 보고 작은 미소를 짓는 미주. 상영관을 나선 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진다.
미주: "영화 어땠어요?"
선겸: "재미없었어요."
미주: "그러셨구나?"
선겸: "오미주 씨도 안 나오고." (미주는 앞서 '제 영화 보러 갈래요?'라고 했었다)
미주: "마지막에 나왔잖아요, '번역 오미주'라고." (...) "보통 다들 잘 몰라요 스크롤 끝까지 안 기다리니까."
선겸: "끝까지 기다려야 볼 수 있는 사람이었네요." (...) "아, 번역이 재미없다는 얘긴 아니었어요. 저는 영화 자체가 재밌어 본 적이 없어서."
3.
영화 속 외국어를 번역한 자막을 싣는 일에 대해 미주는 이렇게 말한다. "뭔가 부자 된 기분이 들거든요, 어떤 한 세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이해해서 세상에 알려주는 그 기분이. 손에 뭔가 가득 쥐고 있는 그런 기분? 내가 뭘 되게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 꼭 부자 된 기분이더라고요."
4.
"불 꺼진 극장에 앉아 있으면, 안전한 기분 들지 않아요? 난 그래서 극장이 좋더라." 미주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과 달리 극장에서 보는 말들은 반복해서 보고 또 보다 보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5.
2화 중반 카페에서 미주가 출력해서 보고 있는 영문 시나리오는 영화 <캐롤>(2015)의 것이다. '캐롤'이 '테레즈'를 보며 말하는 "Flung out of space."라는 대사 옆에 미주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이라고 적어두었다.
6.
작년 9월 <월간 채널예스>에 황석희 번역가 님이 기고한 글 '영화번역가가 드라마 주인공이 되는 날이 오다니'는 이렇게 마무리 된다. "짠하면서도 치열한, 일을 사랑하면서도 늘 일에 치이는, 단조로운 패턴의 일이지만 일 자체는 단조롭지 않은, 이 희한한 직업을 어떻게 그려줄 것인지 기대가 크다."
영화도 드라마도 다 마찬가지지만, 그 작품을 끝까지 본 이후의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것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모두 함께해야 한다. 거기에는 기다림도 필요하고 기대도 필요하고 시간과 마음을 들이는 일이 필요하다. 말과 말을 연결하는 사람과 계속해서 달리는 사람이 주인공인 이야기. <배트맨 비긴즈>(2005) 속 "우리가 넘어지는 건 일어나는 걸 배우기 위함이다."라는 대사를 특별하게 기억하고 그것을 선겸에게도 말해주는 미주의 마음과, 영화의 끝에 가서야 간신히 이름 한 번 언급되는 일을 두고 그것을 "끝까지 기다려야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선겸의 마음 덕에, 이 드라마를 보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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