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 장편 애니메이션을 볼 때 도입에 별도로 단편 하나가 추가되어 있다는 건 이제 픽사 작품 좀 본 사람이면 다 알겠지. 최근 개봉한 피트 닥터 감독의 신작 <소울>(Soul, 2020)도 마찬가지다. '토끼굴'이라는 제목의 약 5분짜리 단편이 들어가 있는데 보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건 본편인 <소울>의 앞에 그냥 삽입된 정도가 아니라 <소울>이 담고 있는 이야기랑 어느 정도 어울리는 면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기도 하다. 원제가 'Burrow'인 '토끼굴'의 영문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A young rabbit tries to build the burrow of her dreams, becoming embarrassed each time she accidentally digs into a neighbor's home."
www.imdb.com/title/tt13167288/?ref_=fn_al_tt_1
토끼는 자신이 꿈꿨던 자신만의 자신만의 집을 짓고 싶어하지만 땅을 파고 들어갈 때마다 주변 다른 동물들의 집 벽을 파게 된다. 두더지도 있고 쥐도 있고 개미도 있고 그 밖의 여러 동물 이웃들이 땅 속에서 각자의 영역을 짓고 살고 있는데, 토끼가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 계속해서 아래로 아래로 파 내려가다 보니 의도치 않게 물줄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가까스로 찾았던 자기만의 공간이 물에 잠겨버리고 토끼는 살기 위해 삽 대신 직접 손발로 다시 위로 올라가 이 구역의 가장 덩치 크고 힘 센 리더쯤 되어 보이는 어떤 이의 문을 두드리고... 손짓 발짓으로 대략의 상황을 설명하자 토끼의 설명을 이해한 그의 신호에 일제히 다른 동물들이 삽을 챙겨 집결한다. 이들은 물줄기를 흙을 메워서 막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상으로 향하는 수로를 열어 물이 땅 위에 있는 어느 연못 같은 곳으로 향하게 만든다.
<소울>의 리뷰를 쓰면서 '미지의 경험이 내 삶을 씻어내도록 열어둘 수밖에'라는 제목을 썼는데, 씻는다고 하니까 이 단편 '토끼굴'에서의 앞서 언급한 저 장면이 생각나는 중이다. 땅속 이웃 친구들은 쏟아지는 물을 막지 않고 지상으로 올라가게 땅을 새로 판다. 물이 자신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처럼. 땅이 한바탕 씻기고 나자, 이웃 동물들은 토끼가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집을 새로 만들어준다. 토끼는 어떤 상황에도 자기가 그린 집의 상상도이자 지도를 가장 소중한 무엇처럼 꼭 안고 있었다.
'극장 밖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나올 가치가 있는 세 시간 반에 걸친 영화 여정: 아니, 어쩌면 그게 삶 자체일지도 - '아이리시맨'(2019) (0) | 2021.01.31 |
---|---|
어떤 영화를 보고 그것에 관해 생각하고 기록하는 일을 이천 번쯤 한다면 (0) | 2021.01.24 |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이 서사를 표현하는 방식 (0) | 2021.01.23 |
미지의 경험이 내 삶을 씻어내도록 열어둘 수밖에: 영화 '소울'(2020) 리뷰 (0) | 2021.01.23 |
나날이 더 넓은 세계를 만나는 '블랙핑크'의 무대 뒤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블랙핑크: 세상을 밝혀라'(2020) (0) | 2021.01.22 |